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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 -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월해(月海)이고 1910년부터 중국 안동현(安東縣 ) 에 무역상을 경영하면서 상해임시정부 및 독립운동가에게 15년간 운동자금을 제공하여 1990년 정부로부터 애족장(愛族章)에 추서(追敍)되었던 독립유공자 광(洸)의 장남으로 1905년 10월 10일 태어났다. 신의주상공회의소 서기를 거 쳐 평양의 사립학교인 대동공업전문학교 강사를 지냈다. 이후 만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지린(吉林) 성(省)의 쉬란(舒蘭)에서 거주했다 . 쉬란에서 사무관을 지냈으며, 조선인 교민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3년에는 친 일 성격의 한국어 신문사인 만선학해사가 발행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만주민요〉를 기고한 일이 있다. 이 책자는 일본 제국이 만주국 건국 10주년 을 기념하여 신징(新京)에서 발행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 시기에 군정장관 보좌 기관으로 설치된 중앙물가행정처(中央物價行政處) 총무국장(總 務局長)을 맡는 등 관리로 임용된 뒤 제1공화국 공무원으로 일했다. 인천세관 장(仁川稅關長), 내무부 건설국 이사관(理事官)을 거쳐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에 외무부(外務部) 차관(次官)에 올랐다. 이후 한국문화연구소 이사장과 도의실 천연맹 대표를 역임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해외 부문에 포함되었다. 졸년(卒年 ) 과 묘는 미상(未詳)이다. 참고문헌 : 고령의 현대사. 고령대관(1959년), 위키백과 ●박영진(朴永晉)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고령군 덕곡면 백리 620번지에서 1921년 3월 27일 태어났다. 1939년 광복군 제5지대장인 나월환(羅月煥)이 광복군으로 모여드는 애국 청년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개설한 한국청년간부훈련반에 입교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뒤 졸업하였다. 1942년 5월 광복군 제1·2·5지대를 합하여 개편 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 광복군 총 사령부와 주중경(駐重慶) 영국 대사관 부관 측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과 인도 주둔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맥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영 상호 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 )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 협 정에 의거하여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이 때 박영진은 총사령부 안원생·제1지대 이영수· 제2지대 최봉진·송철[송연암]·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