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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 - 본관은 진양(晋陽)이며 자는 문보(文甫)이다. 병절교위(秉節校尉)의 품계와 부 장(部將)을 제수(除授)받았던 아버지 서(序)와 현감(縣監) 권세경(權世卿)의 딸 인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명종 13년(155 8 년) 월기촌(月器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 風)을 대대로 이어받아 충효(忠孝)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하였다. 선조(宣祖) 2 2 년(1589년)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고 령지역 최초 전투인 풍곡리(楓谷里) 전투에서 고령출신으로 동방급제(同榜及 第)한 여주인(驪州人) 이천령(李千齡)과 함께 1592년 5월 23일 왜적을 격퇴시 킨 사실이 선조 25년(1592년) 6월 28일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 節度使) 조대곤(曺大坤)이 치계(馳啓)한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아래와 같이 기 록되어 있다. “ 5월 23일에 적은 무리의 왜적들이 고령현(高靈縣) 풍곡리(楓谷里)에 침입했 는데, 박경록(朴景祿)·김응겸(金應謙)·정상례(鄭尙禮)·손호(孫浩)·이천령(李千齡) · 최경립(崔景立) 등이 먼저 왜적 4∼5명을 쏘니 적이 퇴주(퇴주)하거늘 훈련봉 사(訓鍊奉事) 홍걸(洪傑)이 돌진하여 그들을 베었습니다."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萬曆十二年甲申秋別試文武榜目)』에 의하면 박경 록(朴景祿)은 죽산(竹山)출신 무과급제자이고 『만력11년계미9월초3일별시방목 (萬曆十一年癸未九月初三日別試榜目)』에 의하면 남양(南陽)출신 무과급제자이 므로 풍곡리 전투에 참전할 당시 공은 의병(義兵)이 아닌 관군(官軍)의 자격으 로 참전(參戰)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5월 10일 내암(來庵) 정인홍(鄭仁 弘)이 합천군(陜川郡) 가야면(伽倻面) 숭산동(崇山洞)에서 항일거병(抗日擧兵)에 대한 회의를 열고 격문(檄文)을 띄우고 호소하자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진영 (陣營)에 남명학파(南冥學派)의 동문(同門)으로 고령에서는 응헌(凝軒) 김응성 (金應成), 문보(文甫) 정상례(鄭尙禮) 등 3000여명의 의병들이 참여하였다. 그 후 같은 해 6월 4일부터 6월 6일까지 있었던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 공 이 고령대장(高靈代將)으로서 참전한 사실이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壬辰年) 상(上)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고령영병장 (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 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 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 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 일 여명(黎明)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右先鋒) 한여택(韓汝澤)과 좌선봉(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