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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 思)하던 재종숙(再從叔)인 송암(松菴)에게 왜구 (倭寇) 침략(侵略)의 급보(急報 ) 를 아뢰어 송암(松菴) 김면(金沔)이 같은 해 4월 19일 양전동에서 처음으로 의 병(義兵)을 모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후 송암(松菴) 진영(陣營)의 선봉장(先 鋒將)으로 초계(草溪) 마진(馬津), 함안(咸安) 죽현(竹峴) 등지에서 누차에 걸쳐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6월 18일경 낙동강을 통과하던 왜선 2척을 발 견하여 공격한 2차 무계전투(二次 茂溪戰鬪)에서 참전(參戰)하여 장렬(壯烈)하 게 순절(殉節)하였던 것으로 송암실기(松庵實紀)에 기록되어 있다. 2차 무계전 투(二次 茂溪戰鬪)는 왜군의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洛東江 ) 수운(水運) 확보(確保) 계획(計劃)이 김면(金沔) 등의 의병(義兵) 활동(活動)으로 심대(甚大)한 타격(打擊)을 입었기 때문에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地域)의 보 전(保全)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全羅道)로 침공(侵攻)하려던 왜군(倭軍 ) 의 작전계획(作戰計劃)이 무산(霧散)되었다는 점에서 2차 무계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 전투로 평가받을 만하다. 송암(松菴)의 언행록(言行錄)인 송암집 (松菴集), 송암창의록(松菴倡義錄)에는“공불하어곽존재박대암(功不下於郭存齋朴 大菴)”으로 기록 되어 있다. 즉 의재(義齋) 김홍한(金弘漢)이 선봉장(先鋒將)으 로서 각종 전투애서 세운 공(功)이 송암의병진(松菴義兵陳)의 참모장서기(參謀 長書記)를 맡았던 존재(存齋) 곽준(郭䞭)과 전향(典餉)을 맡았던 대암(大菴) 박 성(朴惺)의 전공(戰功)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고 기록하여 그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評價)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宣祖)께서 장군(將軍)의 공훈(功勳 ) 을 가상(嘉賞)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난전(亂廛)중에 시신(屍身)을 거두지 못하여 초혼장(招 魂葬)으로 지내 양산(梁山) 범곡(凡谷) 임좌(壬坐)에 있었으나 2009년 11월 2 0 일 청도군(淸道郡) 이서면(伊西面) 각계리(角溪里) 후산(後山)으로 이장(移葬)하 였다. 대구 망우공원내 영남호국충의단(嶺南護國忠義壇)과 보령(保寧) 호국사 (護國寺)에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어 향사(享祀)를 지낸다. 참고문헌 : 임진란위훈록(壬辰亂偉勳錄)Ⅱ,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청도군지, 의재공 휘 홍한 묘갈명, 고령김씨 갑술보, 병진보 송암실기(松庵實紀), 송암집(松菴集) ●김회(金澮)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지하(志河)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경원부사(慶 源府使)를 지낸 아버지 세문(世文)과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을 지낸 중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