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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曺叅判)에 증직(贈職)된 비(秠)와 지돈영부사(知敦寧府使)를 지낸 자(孜)의 딸인 여흥이씨(驪興李氏) 사 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시대의 5위(五衛)에 속하는 정5품의 무관직(武官職)인 사직(司直)을 지냈고 손자 대년(大年)이 이조판서(吏曹判書) 등 정승(政丞)의 반열(班列)에 올라 귀(貴)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자헌대부(資憲大夫 )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증직(贈職)받았다. 온 마음을 쏟아 경전을 탐구하고 입신 (立身) 출세를 탐내지 않았다. 좋은 곳을 골라 논밭에 물을 대고 도를 지키면 분수를 다하였으니 그 당시(當時)의 사람들이 유영처사(遺榮處士)라 불렀다. 묘 는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장방동 해좌(亥坐)에 있다. 배위는 사직(司直)을 지낸 계손(繼孫)의 딸인 영양최씨(永陽崔氏)이다. 참고문헌 : 고령대관(1959년), 동래정씨 정절공 파보(계축보) ●정응(鄭應)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초휘(初諱)는 창(廠)이었으나 후에 응(應)으로 개명하였 다.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과 승문원(承文院)의 정3품 벼슬 판교(判校)를 지 낸 조언형(曺彦亨)의 딸인 정렬부인(貞烈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삼 남으로 태어났다. 김신옥(金信玉)이 지은 월담정공 사현 행장(月潭鄭公 師賢 行狀)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지은 정공사현(鄭公師賢) 묘갈명(墓碣銘 ) 에는 셋째 아들의 이름이 창(廠)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각도(各道)의 진 (鎭)에 딸린 종사품(從四品) 무관직(武官職)인 만호(萬戶)를 지냈다. 묘는 황정 산(黃鼎山) 할머니 묘 뒤 건좌(乾坐)에 있으며 묘갈(墓碣)은 성산인 이기윤(李 基允)이 지었다. 배위는 성산전씨(星山全氏)로 아버지는 만호(萬戶)를 지낸 영 기(永基)이며 묘는 황정산(黃鼎山) 내합곡(內合谷) 건좌(乾坐)에 있다. 참고문헌 : 진양정씨 족보(을유보), 정공사현(鄭公師賢) 묘갈명(墓碣銘) ●정인운(鄭仁耘)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유성(有成)이다.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종(種 ) 의 장남으로 세종 17년(1435년) 태어났다. 세조 6년(1460년) 무과(武科)에 급 제한 후 중시(重試)에 급제(及第)하였다. 성종 11년(1480년) 통정대부(通政大 夫) 행(行) 경흥도호부사(行慶興都護府使)를 거쳐 성종 14년(1483년) 영해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