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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에 이거하시곤 교수로 봉직하는 자식에 남다른 자부심 지니시었다. 외독자의 독일 유학 눈물로 허락하신 뒤 자손과 헤어지는 깊은 외로움 감추시었다. 출국 앞둔 1981년 5월 15일 83세에 뜻아니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시어 고향 어버이 유택 곁에 상여로 모시어졌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훈장증 464호) 추서되어 나라사랑 열정이 늦게야 표창되었다. 떳떳한 조상으로 자손 긍지 높이시었으니 저승에서나마 기꺼우시리라. 웃대와 공의 유택은 개발로 말미암아 1996년 9월 햇볕바른 가족묘원 남향판에 옮겨 나란히 꾸며졌다. 국립묘지 사양하고 고향땅을 택하였다. 일상에 자주 유학을 논하시고 술과 담배 생선회와 개장국 무척이나 즐기시었다. 몸에 배이신 근검 절약 추원보본에 극진하신 정성 친척 친지와 돈독하신 우애는 이 세상 어느 누구 따를 이 없으시었다. 배위는 김갑배와 김을배를 어버이로 1921년 부여군 석성면 석성리에서 나시었다. 22세에 부군 만나시어 타고나신 부지런함으로 아들 하나 딸 둘 키우시었다. 땅 불리시는 재미에 흰 쌀밥 싫도록 잡숫고 싶다시던 시아버님 소원 한번 제대로 못 풀어 드린 것 평생의 한이라시고 이태리 의사의 도움으로 새삶 찾으시었다며 내내 그 나라에 고마워 하시고 장곡초등학교 지을때 닳은 손톱 피 나도록 보리쌀 으깨어 일꾼 뒷바라지 하시었다. 독일 쾰른 대성당에 많은 상념 남기시고 데레사란 이름으로 천주교에 귀의하시었다. 보훈연금 받자오시곤 한 평생 고생시키던 영감 덕 이제야 보신다며 공허한 웃음을 짓기도 하시었다. 빨간 빛과 장미꽃 좋아하시는 화사한 마음씨 지니시었다. 뼈깍는 아픈 암에 못 견뎌 하시면서 병원보다 자손 목소리에 도타운 정 보듬으시다. 1996년 10월 31일 76세로 운명하시었다. 상여소리 달고소리에 부군 곁에 묻히시었다. 묘원 가꾼 지 어언 한 해 고애자가 어버이 행적 더듬어 비문 지어 안병철이 글씨 쓰고 하산 박충자가 묘표 쓰고 대산석촌 이석근이 글씨 새기어 이 비 세운다. 1967(단기 4330)년 10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