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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2월31일 일요일 7 (제132호) 기획 927년 신라 침공을 앞둔 견훤과 은밀히 책응했을 3의 세력 으로는 누구를 특정할 수 있을까. 김유렴, 김부를 거론할 수 있다. 김부가포석정잔치를기획해경애왕을제거했다는기왕의지적들 도있다.하지만 927년당시견훤의적침을앞에둔초미의상황에서과연 포석정에서 잔치가 열렸을지, 누가 봐도 생뚱맞은 그런 잔치에 경애왕이 과연섣불리행차했을지는심히의문이다. 諸氏의논리는위기에처한 경 애왕을유인할‘달콤한 유혹’으론 뭔가설명과 묘사가모자라다는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생존이란 무거운 현실적 주제를 앞에 두고 파천, 혹은 연대의 한 방편으로 경애왕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유인, 제거했다 는상정이 보다설득력이 있다고생각한다. 김유렴은경명왕원년시중으로활약했다가이태뒤면직되 었다.이후 8년 동안 족적을 찾을 수 없다.경애왕대 족적을 보 이지 않던 김유렴이 경애왕 죽음 직후 김부의 등장과 함께 전 면에 부상, 상국을 역임한 일련의 사실은 김유렴의 정치 노선 이일여(一如)하지않았음을보인다. 김유렴의 부활은 김유렴과 견훤, 다시 김유렴과 김부, 김부 와 견훤과의 3각 밀착관계를 시사한다.김유렴의 화려한 부활 과 정계 복귀는 견훤의 영향력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따 라서 경애왕 죽음과 관련한 견훤의 논공행상의 일환처럼 비 친다.그리고 931년 김유렴은 왕건을 교외에서 맞이하며 전죄 를 용서받으려 진력했으나, 결국 견훤과 대립하고 있던 왕건 에의해고려로압송되었다. 븮三國史記븯12卷新羅本紀12敬順王5年 이는 927년 견훤이 경애왕의 아우 효렴과 김영경을 압송한 것과 비견된다.김유렴은 국상 김웅렴과 ‘렴(廉)’자 돌림의 같 은 항렬에 속하면서도, 경애왕을 놓고 정치적 처지는 정반대 였다고짐작된다. 김유렴의 경우 경명왕 원년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 의 나이는 약관을 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김부와 김유렴이 경 애왕의대척점에있던일군의정치세력일개연성은앞서지적된바있다. ( 박순교, 〈신라 景哀王 죽음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븮三國遺事븯기록을 중심으로〉,븮택민국학논총븯16,2015,p.39의주및pp,45~46의주).927 년 당시 경애왕의 나이 는 3 0대 초반((박순교 , 앞 의 논문, p . 51의 주 61), 김 부는경애왕의표제이므로 30미만의나이였다고짐작된다(경주김씨족 보에는897년생으로 기록되어있고, 이에따를경우김부의당시나이는 정확히30이 된다). 김유렴은김부의당제이므로 927년당시그의나이는 20대후반일것이라보인다. 젊은나이에권력의 주요 정점에 위치 한 이력에서 그의 권력욕 역시 김부에 뒤지지 않았다고 여겨 진다. 경명왕치세전반각기상대등과시중으로서권력의화려한 전면을 누볐던 박위응(훗날의 경애왕)과 김유렴이었음을 생 각할 때, 김유렴이 경애왕의 즉위 이후 권력의 수면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김유렴과 경애왕의 정치적 대극 관계를 짐작 하게 하며,동시에 이를 통해 김유렴의 내적 불만과 권력 의지 는일층커졌다고도믿어진다. 다음, 문제의 인물은 김부이다. 김부의 가계를 추적하면 아 비는 효종,조부는 인경,증조는 민공,고조는 김안(金安),5대 조는 문성왕이다. 김창겸, 븮신라 하대왕위계승연구븯, 경인문화사, 200 3,p.88~89. 왕위및관직만을기준으로보면5대조는왕이지만,이후고 조부터 김부까진 왕위에서 배제된 채 권력 주변을 맴돌고 있 다. 김부는, 장보고를 암살하고 청해진을 허문 문성왕의 5대 손이다.김부의 5대조 문성왕은 염장을 사주하여 세간에 유명 한 장보고를 죽인 것은 물론, 5년 뒤엔 해상 무역 기지 청해진 을완전히폐쇄하고허문장본인이다. 문성왕은 신라 쇠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여파 에 말미암은 것일까? 문성왕은 아들 김안이 있었음에도 숙부 헌안왕에게양위했다.븮三國史記븯권11신라본기11문성왕19년조 즉김부일가의왕위배제는5대조문성왕의결단이빚은과 오요,일종의자승자박에서출발한셈이었다. 이후 김부의 아비 효종이 진성여왕에 의해 헌강왕의 딸과 결혼하며, 왕위 계승권에 성큼 다가선 듯하였다. 하지만 헌강 왕의맏딸과결혼한박경휘(뒤의신덕왕)에밀려왕위에오르 지 못했다 헌강왕이 열다섯에 즉위했다고 가정하면, 헌강왕 치세가 12 년이므로 헌강왕의사망당시연령은최대27살이 된다. 헌강왕이 열다섯 에 결혼했고 즉시 자식을 얻었다고 가정해도 헌강왕 사망 당시 맏이는 최 대12살미만이다.이 점에서경휘(신덕왕)가 헌강왕의 맏딸과 결혼했다 할지라도, 맏딸의 나이를 기준으로 할 때 그의 결혼은, 예겸이 시중에 있 은 헌강왕 6년 이전(최대 6살)은 어렵고 헌강왕대 후반, 정강왕대 또는 진 성여왕 치세 전반이라 짐작된다. 신덕왕의 즉위는 맏사위라는 명분에 앞 서 중의에 바탕한 ‘힘겨루기’에서 효종 계열이 패하였음을 드러낸 확증 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신덕왕의 아들들(경명왕, 경애왕)에게 왕 위가 줄줄이 물려진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김부로선 경애 왕과 마찬가지로 헌강왕의 외손이면서도 신라왕이 되지 못하 는비련의처지에이르게되었다. 견훤은 이들김부,김유렴양자(兩者)의 함원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었고,이들과의 정치적 거래와 흥정,전략적 제휴 역 시처음부터계획에포함하고있었다. 경애왕이 친고려 노선을 견지한 이상, 김부로 대표되는 반 대세력은 친백제 세력의 성향을 띠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친백제 세력의 존재가 설유의 전제 조건이며, 보다 정확히는 설유이전 이미 신라 내 친백제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곧 견훤의 서라벌 침공을 기화로, 김부로 대표되는 신라 내 일부 세력에 의한 양자 간 권력 쟁취를 위한 궤계(詭計), 기모(奇 謀)를꾀할여지는충분한셈이다. 포석정은 효종(김부의아비)이 수천의 낭도를 소집,훈련한 집회의장소,주요세력거점이었지만 븮三國遺事븯권5효선9 貧女養 母 , 동시에 경애왕 자신의 아비 박경휘(신덕왕)가 즉위 이전 머문 잠저가 소재한 곳이기도 하였다. 崔仁읨 , 븮太子寺郎空大師碑 븯(븮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 고려편1븯 ,伽山文庫, P.389) 이에 의하면 박 경휘의 집은 실제사로 바뀌었는데, 실제사는 바로 포석정 인 근 좌우에 위치하고 있었다. 崔匡裕, 〈鮑石亭 奏樂詞〉,븮동경통지븯, 권7,宮室. 또한 포석정은 경애왕의 외조 헌강왕이 접신한 지성소이기 도 했 다 . 븮三國遺事븯권2 처용랑망해사 하여 효종으로 대표되는 김 부 세력과 박경휘로 대표되는 경애왕 세력이 교차하는 지역 이었고, 김부와 경애왕의 연결 고리, 곧 두 사람 공통의 외조 헌강왕이 접신한 곳이었기에 연대, 세력 결집, 아니면 피정 (避程)의 장소로는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에왕건을향하여김부 가 “모든 화란을 내가 불러들였다”는 고백은 견훤의 입김이 강해지게 된 단초, 곧927년경애왕의죽음과 포석정사건및김부 자신의책응을지칭 하는것으로서, 눈물 섞인이 단 한마디의고백(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 12경순왕5년조)이야말로 함의하는바크다고여겨진다. 927년 경애왕의 죽음을 풀 핵심 단서를 다시 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아래 자료들은 모두 경애왕 죽음 직후 견훤과 왕 건이주고받은편지글이다. 한데 견훤은 가-1) ⑧에서 자신이 경애왕을 시해하지 않았 음을 밝히면서도 시해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특정하지 않았 고,또특정인이아니라고하지도않았다. 견훤은 927년 당시 서라벌에 입성했고,보름동안궁궐에머 물기도하였다.븮三國遺事븯권3 삼소관음중생사 그런견훤이경애왕시해라는무겁고긴요한사안에직면하 여, 대의와 명분을 세울 행동에 해당하는 즉각적 조치, 즉 국 사범에 해당하는 시해범을 체포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된다 “不意姦臣遁逃邦君薨變”(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 및 븮三國遺事븯기이2후백제 견훤조에 공히 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사건현장에 가까이 있었고, 휘하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견훤의 공간적, 물리적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왕을 시해한 주범을 알지도,잡을 수도 없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을넘어애초계획한것이아닌가짐작된다. 견훤의 애매하고, 모호한 이 발언은 견훤의 심각한 방관으 로서 경애왕 시해 주범을 방조하거나 은닉, 내지는 함구하고 있다는느낌마저가지게한다. 경애왕 시해의 주범은 김부 일당임이 지적된 바 있는데. 견 훤이 이렇듯 경애왕 시해범을 미궁으로 처리한 것은 김부를 경애왕 시해 주범으로 떳떳이 밝힌다면 왕의 시해범 김부를 ‘권지국사’로 옹립한 것이 되어 김부와 견훤 모두 명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견훤 자신이 경애왕을 시해하지 않 았음을 뚜렷이 밝혀야만 하는 이중적 난제 앞에서 왕의 시해 범은 ‘종적을 알 수 없는 난신’으로 표현되게 되었다.결국 가- 1) ⑧은 장고(長考)를 통해 계산된 궁여지책이었으리라 여겨 진다. 諸氏의 주장대로 김부가 경애왕 시해의 주범이었다면, 왜 김부는 史書에 경애왕 시해범으로 특정되지 않은 것일까도 생각할 문제이다. 왕 건과 김억렴(김부의 백부) 딸의 결혼. 낙랑(왕건의 장녀)과 김부의 결혼, 경종과 김부 딸의결혼등의중혼관계, 935년김부가나라를들어왕건에 게자진투항한 사실등에서왕건역시김부의죄과를드러낼현실적필요 성을느끼지못한 듯하다. 게다가김부의자진투항을保國의조치라찬양 하는 븮三國史記븯곡필 하에서는 경애왕의 죽음에 대한 규명은 어려웠다고 보인다. 가-1) ⑨, 가-1) ⑩역시 주목할 사항이다.견훤은 김부를 경 명왕, 헌강왕과 연결하고 있다. 견훤은 김부를 문성왕의 6세 손 내지는 경애왕의 표제(이종4촌 동생)라고 밝힐 수 있었음 에도 그러한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대개 그 사람의 출자를 얘 기할때,직계내지시간의가까움을우선으로한다. 이 점에서, 김부는 직계로는 문성왕 6세손, 시간상으로는 경애왕의 표제로 함 전왕의권력을물려받을계승의정통성을강조하 려했다면전왕과의관계를강조함이 순리였다고보인다. 븮三國史記븯권50 열전10견훤전에선 이 점을 의식한 듯, 김부가경애왕의 족제라 표현되어 있다. 말하자면 미묘한 문면의 차이를 의식한 결과 의혹을 없애려는븮三 國史記븯의자의적인곡필이 행해지고있는셈이다.이 옳 을 것 이 다 . 이 경우 김부의 혈통과 정통성,전왕과의 유대,혈친을 통한 계위 의 명분이 확보된다. 견훤이 김부와 관련하여 헌강왕과 경명 왕을 내세운 것은 왕건의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 김부 즉위에 대한이의를사전에차단하기위한노력의발로라여겨진다. 또 하나, 경명왕(景明王)의 표제(表弟)(가-1) ⑨)라 한 사 실이 헌강왕의 외손(가-1) ⑩)이란 구절보다 앞선 점도 주목 된다.시간상 헌강왕의 외손,경명왕의 표제가 일반적이다.그 럼에도 견훤은 굳이 역순을 취하였다. 헌강왕은 김씨, 경명왕 은 박씨이다. 견훤은 김부 곧 김씨를 권지국사에 올리면서 먼 저 박씨인 경명왕을 거론하였고, 이는 박씨 왕계에 가탁하려 는노력의일단을보인셈이된다. 견훤은 어찌하여 신라 하대 돌출하듯 등장한 박씨 왕계를 전면 부정하고 김씨 왕계를 복원, 신라의 정통성을 회복했다 는 따위의 자랑스러운 대의를 천명하지 않고, 대신 김부와 박 씨 왕계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데 연연하려 한 것일까. 거기 에 대한 해답은 후술하겠지만, 견훤의 서한을 받은 왕건의 태 도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견훤은 이어 훙변을 당한 경애왕을 이어 김부를 권지국사로 옹립,끊어진 사직을 부활시킨 ‘再造’ 의공이자신에게있음을밝혔다.또가-1)의⑫이후부터는본 격적으로 왕건이 취한 군사행동의 허실을 낱낱이 거론하며 공박하고있다. 요컨대 견훤은 왕건과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은 힐 난하면서 경애왕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일언반구 피력하지 않 았다.이것은 경애왕과 자신이 隻을 지지 않았으며,그 결과 자 신이경애왕을시해하지않았음을드러내려는의도라보인다. 견훤은 경애왕의 직접적 죽음과 자신은 무관함을 밝혔고, 견훤 자신이 고울부에 주둔하며 설유를 벌인 점에서 신라 내 반왕 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이뤄졌음을 짐 작할수있다. 견훤이 왕건에게 서한을 보내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시점인 928년 정월,왕건은 견훤에게 답신을 보냈다. 븮三國史記븯에 인용된, 왕건이 보낸 답서는 총 693자에 달하 여 全文이라 짐작된다. 그 중 일문의 형태로 인용한 가-2)의 主旨는 ②斬戮君王 ③焚燒宮闕 ④ 卿士 ⑤虔劉士民 ⑥姬 姜則取以同車 ⑦珍寶則奪之 載 등 소위 견훤의 6가지 죄악 이다. 견훤이 분명 왕을 참륙했으며 궁궐을 불태우고 경사(卿士) 를 젓갈로 담구고 사민을 도륙하고 미녀와 진보를 약탈한 죄 상을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다. 견훤이 잔학한 짓을 일삼아 그 의 죄가 깊고 중하다는 논지로 일관되어 있다. 살해광(殺害 狂), 훼멸광(毁滅狂), 겁략광(劫掠狂) 등 견훤의 출현을 재앙 과동일시하였다. 위에서 일문의 형태로 인용한 가-2)는 전문에 속한 내용의 한 단락이며, 까닭에 왕건이 견훤을 정죄하고 있는 내용의 전 부라 단언할 수 있다.그리고 위의 죄악들은 마치 서초패왕 항 우의 행악과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왕건은 견훤을 항우 에 비견하고 최후의 오강 전투를 언급하고 있다.(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훤 및 븮三國遺事븯기이2후백제 견훤조에 공히 인용된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서한’) 말하자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어 왕건 진 영이견훤을정죄하는거의모든내용을담고있는셈이다. 무엇보다왕건의서한전문에서주목되는것은간적견훤이 신라왕을 옹립한,신라사의 유일무이한 작태,곧 ‘택군(擇君)’ 의문제에관해서왕건이침묵하고있다는점이다. 당연히거론되어야할김부의신라왕에의옹립문제에관해 서는 왕건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견훤이 김부를 옹립한 것 은분명하여의심의여지가없다.견훤이멋대로신라의왕(권 지국사)을 옹립한 만큼,김부라고 하는 새로운 신라왕의 정통 성에 대해서 왕건이 의구심 내지 거부감을 표시할 수 있는 상 황이었다. 한데왕건은희한하게도김부에대하여별다른이의를표하 지 않았다. 또한 김부의 즉위라는 사안을 놓고 정통성에 일언 반구 이의를 다는 왕건의 행동을 발견할 수 없다.김부의 즉위 에 대한 왕건의 침묵과, 견훤이 내세운 김부의 출자, 곧 김부 와 헌강왕, 경명왕과의 삼각관계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 거 라 보인다.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이 세운 김부의 왕위 추대 정 당성을 설파하려 했을 터, 견훤이 굳이 경애왕이 아닌 경명왕 을내세운것은왕건의심사를투영한것이아닌가한다.곧경 명왕에 대해서 와는 달리, 경애왕에 대하여 왕건이 일정한 거 리감을 지녔고,견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통찰,인식했 음이 아닌가 한다.왕건과 경애왕 사이의 ‘일정한 거리감’이라 는 사실이 결국 견훤이 김부를 경애왕이 아닌 경명왕과 연결 지운 배경이라 보인다 이미 약소국의 처지로 전락한 신라 경애왕이 군략을 앞세워 왕건에게 견훤과 싸우도록 한 일련의 충고(븮三國史記븯권1 2신라본기12경애왕2년조및3년조, 븮高麗史븯 권1세가1태조신성대왕1 0년조)조차 왕건에게는 심각한 내정 간섭 등으로 비쳤을 개연성이 있다. 이에서920년10월왕건이 경명왕의위기를구원함에성공한 것과,927년 경애왕이 직면한 위기를고려가구원하지못한 이면의사정도더쉽게유 추, 이해할수있다고보인다. 왕건은경명왕과 경애왕이 친형제지간임을 알고있었다. 견훤이 경애왕대신경명왕을내세운점이야말로 왕건과 껄 끄러웠던 경애왕 대신 왕건과 친밀했던 경명왕을 전면에 내세워 김부 옹 립의정당성을설파하려는견훤의계산이었다고보인다. 왕건의 서한에선 또 하나 927년 신라 경애왕의 위기에 대한 왕건의 방관을 엿볼 무언의 단서가 포착된다. 븮三國史記븯에선 왕건이927년경애왕의구원요청에대하여경병1만을파견했 다고 하였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 븮三國遺事븯권2기이 2 김부 대왕 괴이하게도 왕건의 서한에선 그와 관련한 일체의 언 급이없다.왕건이평소존주(尊主)와견마지로의태도를표방 한 것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훤 및 븮三國遺事븯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 공히인용된‘왕건이 견훤에게보낸서한’과 경 애 왕 의 죽 음 에 관 한 전 후 관계를 통하여 볼 때, 왕건 자신이 견마지로를 다했음을 드 러낼가장중요한전거는1만구원군의파병사실이다. 한데 왕건은 물론 견훤조차 고려 구원군 1만에 관한 언급이 전무하다. 이 점은 기록에 전하는 고려 구원군 1만의 파병은 현실화되지 않은, 그야말로 가상의 파병, 무산된 파병이었다 고 여겨진다. 이처럼 실현되지 않은 가상의 파병을 마치 실행 된 것처럼 기록한 븮三國史記븯의 기록 “命將出勁兵一萬往救甄萱以 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븮三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4 년)은 왕건을 변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충실한 곡필이라는 느낌이짙다. 다음, 가)-2의 ④에서는 견훤이 경사(卿士)를 죽여 저해로 담갔다고 되어 있다.이 경우의 경사는 속칭 공경대부(公卿大 夫)의 경(卿)과 일군의 사(士)를 지칭하는 것일 만큼, 경애왕 을 추종하던 신료임이 분명하며, 경사와 군신을 동의어로 보 아무방할것이다. 한데 븮三國史記븯에는 저해( )란 구절이 없고 경애왕과 함께 한 군신(群臣)은 포석정에 함몰되었다고 했다.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 견훤 븮三國史記븯와 왕건의 서한이 각기 함몰과 저해, 곧 선택적 사항을서술하고있다.둘중의하나는거짓일공산이크다. 븮三國史記븯의 함몰이란 내용보다 왕건 서한의 저해가 더욱 표독한 언법이다.븮三國史記븯가,경애왕의 죽음과 동시대에 속 하는 왕건의 서한을 인용하면서도, 저해가 아닌 함몰이란 단 어를 사용한 것은 저해의 현실성을 부정한 까닭이라 보인다. 이처럼 중국의 사서에서나 볼 수 있는 충격적 악행을 들어 중 국 殷 왕조의 마지막 임금 紂왕이 신하들을 븮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 과소금에절인고기)븯,븮脯(저며서말린고기)븯,븮炙(구운고기)븯로만든전례 가 있다(븮史記븯卷3 殷 本紀3). 춘추시대 공자는 븮해븯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 사를 안 했을 정도였으나.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왕 위 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시체가 잘게 토막 내어져 해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을듣고는좋아하던해를먹지않았다는전승이있다.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제나라환공은미식가로도유명했는데그가진미를찾자요리사인 易牙는장남을잡아서삶아바쳤다는전승이있다 ,당시 왕건은견훤을 세차게 공박한 것이다. 또한 왕건은 서한에서 견훤이 경애왕 을 ‘참륙(斬戮)’했다고 주장했다.‘참륙’이란 견훤이 경애왕의 목을 잘라 죽였다는 것인데, 견훤이 이러한 잔인한 살해 방법 을 통해 신라의 민심 이반을 굳이 자초할 까닭이 없다.게다가 군략에 밝은 견훤이 군중(軍中), 곧 공적 장소에 데려와븮三國 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조(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경애왕을 참수했다는 것(가-2) ②)은 더 욱믿기어렵다. 가-1)⑫의 구절 역시 주목된다.이에서 왕건이 서라벌의정 정을 여러 비선(秘線)을 통해 수합하고 있었으며, 왕건의 그 러한활동조차견훤이거꾸로인지했던상황임을드러낸다. 또한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에서 “致使王之至尊, 枉 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이란 한 걸로 보아 당시 서 라벌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 다고보인다. 그러나 927년 경애왕 죽음의 사건 현장에서, 물리적 공간의 거리를 따질 때 견훤이 왕건보다 훨씬 근접해 있었다. 심지어 견훤은 사건의 당사자이자 목격자에 가깝기도 하다. 반면 왕 건은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왕건의 주장은 어디 까지나3자적견지에입각해있다. 일례로 가-2) ⑦에서 견훤이 신라의 진보(珍寶)를 무자비 하게 강탈하였다지만, 불과 8년 뒤인 935년 김부가 왕건에게 항복하러 갈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뻗쳤다 븮三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9년 11월조. 븮高麗史븯 권2세가2 태조 신성대왕 18년 11월조. 이것은 견훤의 약탈이 왕건의 말과 달리 극히제한적이었음을알게한다. 견훤의서라벌침입이후8년동안신라는약세일로를걷고 있었다. 서라벌 주변 세력조차 독자적 움직임을 보인 상황이 었다.김부가왕건에게바친재화는전국(傳國)의보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935년 김부가 왕건에게 바친 진보는 견훤의 약탈이 가 -2)⑦과는 달리 제한적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실제 왕건 이 그토록 탐내었던 신라 3보의 하나인 진평왕의 ‘천사옥대’ 조차 븮三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5년 정월조 935년까지 김부 의수중에고스란히남아있었다.븮三國遺事븯권1기이1천사옥대 미신과참언을崇信했던견훤이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신성대왕 9년4월조무차별 약탈을 자행했다면 옥대를 그냥 두었을 리 없 다. 그럼에도 왕건이 가-2) ②∼⑦에 걸쳐 견훤의 이른바 6대 죄악을 거론, 힐난하고 있다. 이리하여 견훤의 진면목은 사라 지고 왕건에 의해 분식,규정,투사된 Persona가 견훤인 양 사 서에 둔갑한 셈이다. 견훤의후광으로 경애왕을대신해권력을잡게된 일군의 세력들이 견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자신들의 권력 정당 성을 견훤에게서 승인받기 위해 자진하여 왕건이 언급한, ‘물산과 여인 들’을상납했을개연성은있다. 곧935년김부가신라의남은진보를모두 수레에싣고왕건에게바친것과 기시감을불러일으킬사건이 927년에는 있지않았다고볼 하등의이유는없다. 왕건 진영의 선전물(Propaganda)이란 특성상, 없는 사실 마저 날조하는 등 악의적 표현이 다분했다고 여겨진다. 한데, 이런 기산(譏 쇠)을 담은 서한에조차,‘견훤의 경애왕비 강간’, ‘집 단 강 간 ’ 항 목 이 없 다 . 가)-2의 문면대로라면 견훤은 경애왕의 왕 비를강간하지않았다. 앞서견훤은義風을내세우며신라내조야를대상 으로 고도의 심리전을 폈다(가-1) ⑦). 그런 마당에 백제 군사들에게 경애 왕의비첩에대한 집단 강간을종용하고, 자신은왕비를능욕하여민심을 이반시키는 자충수를 두었다는 것은 모순이다.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지 않았음에도, 역설적으로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했다고 적시한 일련의 기록들(가-1) ⑬, 나-1) ⑩)은 왕건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견훤의악행을확대,재생산한 것으로,철저히견훤을정치적표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는불순한 저의를지녔다고볼 수밖에없다. 견훤을 공박하기에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견훤이 경애왕 의 왕비를 강간한 사실’이 빠져 있음은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 것일까. ‘국왕 시해’에 못잖을 ‘왕비 강간’이란 충격적 호재에 관하 여 당시 왕건이 적시, 공박했어야 마땅했음에도 철저히 침묵 했다는 것은 단적으로 견훤이 왕비를 강간하지 않았음을 드 러낸다.가-1)의④鼈應 쫴 聲 披 펭 翼⑤生靈塗炭宗社丘墟⑥先着祖鞭 獨揮韓鉞등폭넓은 經史典籍의인용, 유려한 문장에서 보이듯 뛰어난 유 학자집단의보좌를 받고, 완비된 군략을 염두에 두고 전쟁을 벌였던 견훤 이‘왕비강간’과같이천하에오랫동안회자되고일거에민심을잃을일탈 을자행했을현실성은없다고여겨진다. 그럼에도븮三國史記븯는시종고려 왕조의 개창자 왕건=선인, 견훤=악인이란 프레임 아래 사실의 확대, 가 필,날조를일삼았다고판단된다. 견훤의군사들이비첩들을 능욕했다는 사실도븮三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조, 왕건의 당시 서한에선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2) 뱚Ⅰ.927년경애왕의죽음과김유렴 박 순 교 뱚Ⅱ.927년경애왕의죽음과김부 뱚Ⅲ.927년경애왕의죽음과견훤행동의의문 뱚Ⅳ.왕건이견훤에게보낸서한 박 순 교 뱚Ⅴ견훤의악행기록은고려왕조가벌인조작 목 차 Ⅰ.927년경애왕의죽음과김유렴 Ⅱ.927년경애왕의죽음과김부 Ⅲ.927년경애왕의죽음과견훤행동의의문 Ⅳ.왕건이견훤에게보낸서한 Ⅴ.견훤의악행기록은고려왕조가벌인 뱜뱛뱜뱜조작의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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