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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山亭遺墟實記옥산정유허실기 정자(亭子)는 바로 우리 선조 졸당공의 유지(遺址)이다.공의 휘는 총이오 자는 명옹이며 졸당은 그 호이다.일찌기 진사과에 급제하였더니 유일(遺逸)로 천거되여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됐다.만년에 밀양에서 삼산의 송지촌에 이거했는데 마을 앞에 둥글납작한 독뫼가 하나 있으니 곧 악견산의 여맥이다.공이 여기에 단을 쌓고 그 위에 여덟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그 위에서 소요하고 상영(觴詠)하면서 옥산이라 이름하니 대개 산이 아름다워 둥근 옥과 같으며 또 ‘주자의 옥이 감추어져 있으니 밝은 빛을 머금었다’한 시의 뜻을 딴 것이라. 드디어 남주의 명승지가 되더니 그 후에 자손이 대대로 현달하여 잠영이 세습되고 여덟사람이 인수를 정자에 걸었던 일 있어 또 팔인정이라 일컬으니 사람들은 말하기를 박씨 여덟 사람이 여덟 소나무와 상응하니 옛적 왕씨가 삼괴로 하여금 삼공이 있음과 다르지 않다 했다.공의 오세손 휘 천우와 휘 천기와 휘 서구와 삼종형제가 모두 이름난 행적과 현달한 관직이 있었는데 일찍이 유적을 추모하여 소나무를 어루만져 배회하더니 임진년의 난을 당하자 팔정공은 곽재우 대소헌 조공종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술잔을 들어 죽기를 맹서한 글이 문집과 실기에 실려 있고 여지승람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호라! 정자는 이미 기백년의 풍상에 변천을 겪었으니 소나무가 많이 없어지고 이제 있는 것이 수 주에 불과하여 아무것도 표적될 것도 없이 예사로운 한 구릉과 같으니 자손된 자의 통한일 뿐하니라 사림의 제우들도 함께 차탄하는 바이다.그 망실되여 전하지 못할까 두려웁기에 돌을 마련하여 사실을 새겨 표지로 삼는다. 십삼세손 효영 삼가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