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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맺음말 이상 살펴보았듯이 박익 묘의 벽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하고 중요함이 확인된 다. 이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 무엇보다고 고분벽화의 전통이 조선왕조초기인 15세기초까지도 계송되었다는 사 실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 인물풍속과 매죽(梅竹)이 함께 그려진 유일한 예이다. @ 벽화의 제작은 조선초기에 이루어졌지만 내용은 고려말의 것이어서 여말선초의 회화, 복식, 기물 등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 동벽과 서벽에는 인물군과 매죽(梅竹)이, 남벽에는 말과 마부들이 그려져 있고 북 벽에는 박익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5) 4벽에는 현실세계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라고 천장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일월성신 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 벽면과 천정 또는 현실세계와 천상의 세계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처럼 당초문 대로 구분되었다. 또한 벽면과 지면(혹은 지하세계)은 벽돌무늬로 구별되었다. @ 동벽과 서벽에는 각각 4인l조의 인물군들이 3개씩 6개가 그려져 있어서 모두 24 명의 인물들이 그려졌던 것이 분명하다.4인1조의 인물들은 고식의 삼각구도를 형성하 고 있다. 남자들은 단령포를 입고 벙거지를 썼으며 가죽 장화를 신은 채 제례에 소용 되는 지물을 들고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넉녁한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혜를 신었으며 머리에는 꽃모양 장식을 하였다 여자들은 머리모양을 소녀 쌍환계나 수련계(휩횡졸)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머리모양으로 보아 미혼의 시녀들로 판단된다. @ 동벽과 서벽에는 인물군들 사이와 남북 양끝의 여백에 매죽을 그려 넣었는데 이 는 묘주인 박익의 충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무텀 안에 매죽을 그려넣은 것은 왕건릉과 정종릉 등 10세기 고려초 고분의 전통을 되살린 것으로 생각된다. 화풍은 원 대와 관계가 깊다고 생각된다. @ 남벽에는 2필의 말과 2명의 마부가 그려져 있는데 마부들은 직령포와 장화, 그리 고 몽고풍의 발립(錄쏠)을 착용하고 있다 머리모양과 엣띤 얼굴로 보아 수련계를 한 동자들로 판단된다. 남벽의 벽화는 통벽과 서벽의 벽화에 비하여 필법이 더 정치하고 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