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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가 아닌 점을 고려하면 박익의 부부병좌상보다는 단독상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고구려 무용총(舞뼈爾 현실 북벽의 경우처럼 초상화 대신 묘주의 생활상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겠지만 동벽과 서벽의 벽화내용이 묘주를 주인공으로 하는 평상시의 일상 생활상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님을 보 면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겨진다 8) 동벽과 서벽의 인물들이 각종 기물들을 들고 있음을 보면 그들은 아마도 묘주인 박 생각 초의 박익 것이라고 15세기 익을 위한 공양(供養) 행열이나 장례의식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고 있는 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당대의 李重潤의 묘 벽화등이 참고된다.9) 묘 벽화가 당대 회화의 영향을 직접 받아서이기 보다는 그러한 의식이 시대를 여 계승되고 재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묘주인 박익이 1420년에 달리하 현재의 무 없다 덤에 묻힌 것을 고려하면 이장(移慶)에 따른 제사행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남쪽 벽에는 말과 마부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그려져 있다(圖4) 묘주인 박익이 타고 。1 느二 λλ'- 속에서의 대기하고 일상생활 갈수 있도록 지,아니면 것이라 생각된다 박익이 타고 천상을 향하기 위한 것인 출타를 위한 것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묘주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박익 묘의 벽화내용을 종합해보면 북벽에는 박익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을 것이고, 동벽과 서벽에는 각각 4명씩으로 이루어진 인물군이 각기 셋씩 그려져 있어 벽마다 12 명의 인물들, 양쪽 벽 모두 합쳐서 24명의 남녀가 북벽의 묘주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 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남벽에는 묘주가 타고 갈 2필의 말과 두명의 마부가 대기 하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육안으로는 단정하기 보이지 않고 또 쉽지만 특수촬영 개석(蓋石) 내면이 이루는 천장 부분에는 벽화의 잔흔이 표면이 울퉁불퉁하여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을 것으로 결과 별자리 비슷한 흔적이 확인되었다(圖5). 고려시대의 벽화고분들의 천장에 다양한 성수도(星宿圖)들이 그려졌던 사실을 감안하면 1:l)'ol -- , -- , 묘의 천장에도 하늘을 상징하는 8) 무용총의 현실북벽에는 주인공의 초상화 대신 주인공이 승려들을 맞아 접대하면서 대화하는 장 면이 그려져 있어 옆에 붙어있는 비슷한 시기의 각저총의 부부병좌상과 큰 차이를 드러낸다, 金 元龍, r뿔畵J , 韓國美術全集4(同和出版社, 1974), 圖47, 49; 안휘준, 상게서, pp.67-70참조. 9) 일례로 당대 李重돼(682-701)의 묘애는 병이나 쟁반 등의 기명이나 기물들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여러명의 시녀들이 그려져 있어 박익 묘의 시녀들과 비교된다. 俠西省빠物짧 · 俠西省文物管理委 員會 編, r居李重i間훌뿔畵J (北京:文物出版社, 1974), 圖31-38참조. - 1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