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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으 - 마 ;ζU c. 평범하게 살아간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어려운 시기 그의 삶의 모습을 평가의 잣 대로 삼지만, 특히 국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 조정 관료들의 삶과 행동방식에 대한 잘 잘못은 격동기의 대응방식을 통해 평가하기 마련이다. 松隱 朴翊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격동기에 자신이 옴담고 있던 왕조를 유지시키려다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 節義를 지켜 낙향 · 은거의 삶을 살았던 양심적 지식인이라 평가첼 수 있다 박익은 원간섭기 고려에서 여말선초에 걸치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다. 그가 태어난 고려시대 밀양은 大둠으로서 物塵과 인물이 풍부한 고을이었다. 무인집권기 이래로는 농민항쟁, 삼별초항쟁의 진원지가 되었던 항쟁의 고장이기도 하였다. 항쟁을 겪었던 밀 양 지역은 국가로부터 통제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지만, 오히려 고려후기에 와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박익은 어린 시절을 원간섭기라는 외세 종속구조 하에서 보내고 성장하였는데, 이러 한 경험은 그에게 자주의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대에 科 瓚를 통해 관료로 진출한 그는 승진이 매우 늦은 편이었지만, 초년에는 주로 지방관이 나 중하위직을 역임하면서, 당시 들끓고 있던 f委찮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왕 13년부터는 司宰少藍의 관직을 맡는 풍 중앙관직에서 활 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이전부터 교류해 왔던 李橋 · 鄭夢周 · 吉再 둥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여,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박익이 중앙관료로 활동했던 시기는 왕조교체기라는 격동기였다. 威化島에서 회군한 이성계세력은 조선건국에 뜻을 두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많은 인물들 을 숙청하였다. 우왕의 폐위, 金仔의 微, 공양왕 옹립, 尹흉 · 李初사건, 정몽주 살해사 건 등이 발생할 때마다 고려왕조를 유지하려는 인물들을 차례차례 숙청되어 갔다 박 익은 끝까지 정몽주 · 이섹 등과 함께 동조세력이 되어 고려왕조를 지키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살해당하고 이후 왕조교체가 가시화되자, 교우관계를 가졌던 동료들과 함께 낙향 · 은거의 길을 택함으로써, 고려왕조에 忠節을 다하였다. 뒷 날 그가 ‘柱門洞72賢’으로 주앙받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