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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두견새에 비유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표현하고, 낙향해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시에서54) 보이듯이, 그는 곧 평정을 되찾아 밀양의 산천 속에서 지난 날을 정리하고 시문을 지으면서 자족하는 모습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홈木技頭宿鳥짧 關關11帝入高臺明 높은 나무가지 끝에 잠자던 새 놀라서 깨면, 편편 이 지저귀며 옛집 찾는다. 판tl幾望雲千里 血淚虛流月五更 일편단심 구름천리 얼마나 바라봤던가, 덧없이 피 눈물지어 오경이 되었네. 天地光陰朝11英日 江湖消息、-5尋盟 아침에 헤비치면 천지광음 온 줄 얄고, 저녁이변 동지 찾아 강호소식 듣는다 {종人莫問興亡事 遊水遊山足一生 이 사람들아! 흥망사 묻지마소, 산에서 놀고 물에 서 노니 한 세상 족하다오. 박익이 낙향 · 은거하면서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당 시 節義를 지켜 고향으로 낙향한 인물들이 지방에서 학문에 힘쓰고 유학을 보급하면 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박익 역시 낙향 후 사망할 때까지 이같 은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익이 사망하는 것은 조선왕조가 개창된 지 7년만인 정종 즉위년(1398)이다 이는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 황희가 쓴 박익의 쫓表에서도 ‘公生千王申 추千Jj(;寅’이라 하고 있어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誌Æ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 을 전하고 있어 그 沒年을 의심스럽게 하고 있다 CD 朝奉大夫司宰少藍 @ 朴翊훌훌長子廳二子昭三子O}f @ 四子碼長女適孫찢二女適曺 @ 功껄흉三女適孫{意 @永樂康子二月甲寅舞 54) l"松隱先生文集』 권 1, 試, 試懷 - 1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