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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조선건국 과정에서 숙청된 인물들 사건 威:fr.島며軍 金↑혐듬t 공OJ:왕옹립 촬 ·初사건 金宗何사건 鄭夢周살해사건 崔瑩, 宋光 禹玄寶, 禹洪 李橋, 李種 李챔, 李種學, 金宗삐 i't德 李橋, 金옳附, 李種學, 李f훨홉, 美, 安ijg, 鄭 뚫, 禹↑二烈, 李 헬, 좁敏:{It, 뻗敏flt, 禹玄寶, 符, 때i맺奇, 朴 李뿜{二, 禹玄寶, 禹洪壽, 禹洪 承可, 印原 !t*, 李貴生, 柳 李뿔仁, 權 禹{二烈, 李!t*, 威, 尹師德, 李 富, 禹洪얹, 禹l현흉, 禹洪命, 禹 寶, 安柱, 鄭 햇, 崔i없, 盧龜 近,河뿜, 文 李貴生, 邊쳤!l, #Z, 李찮, 李 成範, 趙f짜 姜ìlt伯, 姜ìlH11, 姜 熙햄, 金若 山, 李뺀, 鄭:lt!l, 達않, 李졌 윷1’:lt!l, 李뿔仁, i7Ç, 陳元f風 朴 ìlt季, 李1t~, 李11. 李據, 李來, 宋,햄뼈,햄 安柱, 超f休 찢1’ 4품近, 챔{빡0, 天함., 朴可興, 李敢, 權弘, 영ß熙, 金故, t~중1{, 福善, 尹祚, ~땀, *ι珍, 金宗fìr, 李仁敏, 金j~府, 짧영、, 李作, 李빼, 李11.흙, 李士짧, (찢長 인명 趙珪, 趙 rtf 王安德, 金유, 安柱, ~톨夏, 慶 張짧, 趙챔,金 뚫, 柳iJí., 金隨, 安쟁生, 崔때, 李居仁, 洪永 補, 崔公哲, 洪 훨t 李(빽0, 天 3앤흉, 柳惠孫, 柳빼, 安翊, 金南 通, 邊安烈, 찢1’ 仁桂, 尹有찮, 用, 朴元實,金 得, 崔Z義, .I1}貴, 都옛, 安 得멸, 柳훤、孫, 陳ι瑞, 펠彦, 可物, 李方春, 援, fý~廷顯, 許맴, 朴興j뿔, 安 李’따仁, 趙f뼈 흉|廠, 崔{;5 任원펴옳 權格, |찾, 빼元弼, 힘~, 姜1=富, 金允 元ff-, 趙方與, 鄭子運, 楊百 흙, 姜除, 成石I흉 成石溶, 李元 柳審, 李康道, 之, 尹龜j뿔 *1, 姜홉, 함j댔, 王和, 王珪, 王 金伯옛 }쥔, 王폈, 王잖, 王뼈, 王福 인원 13 28 8 24 26 64 위화도회군 후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세력을 제거한 이성계세력은 이색 · 조민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창왕의 왕위계승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金유의 歡을 계기로 우현 보 둥을 제거하는 한편 창왕마저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게 된다. 정도전 등 이성 계세력은 다시 페뽑昌非王說’을 제기하면서 廢假立률을 내세워 공양왕 옹립을 적극적으 로 추진하였다 34) 福昌非王說은35) 이미 위화도 회군 후부터 제기되었던 것으로, 이성 계파에 속했던 조준 · 윤소종 · 吳思忠 등은 유교의 명분론과 春秋大義를 앞세워 창왕 의 즉위에 반대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색 등은 君昆義理와 天理 • 天倫을 주장하면서 이애 맞서고 있었다,36) 위화도 회군 직후 이성계파는 당분간 이색 등 온건론자의 입장 을 수용할 수밖에 없어서 창왕의 즉위를 받아들였던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본래의 의 도대로 공양왕을 옹립한 것이다. 34) F'高麗史節要』 권 34, 창왕 l년 11월. 35) 福昌非王說의 실체에 대해서는 朴亨杓, r朝빡建國에 대한 是非」, 「學術志、Æ 8, 1967 및 尹斗守, 「 福昌非王펌의 1iÆ究」, 『考古歷史學志~ 5 .6, 1989 참조 36) 도현철, r高麗末期 士大夫의 理想、君主論」, r東方學志냉 88, 1995, 14-21쪽. - 1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