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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지는 고광순, 임봉구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전남 광양일대에서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으며 군연락 책임자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적량면 동점마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다 27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분연히 궐기, 고광순(高光洵)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896년 을미의병 당시에도 거의한 바 있었던 고광순 의병장은 1906년 12월(음력) 전남 창평군(昌平郡) 저산(猪山)에서 다시 거의의 기치를 들었다. 1907년 4월에는 전남 화순(和順)을 점령하고 부일배를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을 축출하는 활발한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동에서 군사 1,000여 명을 소모하여 재출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고광순 의병장이 전사함으로써 의진은 그만 와해되고 말았다. 박홍지는 이와 같은 고광순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은신책의 일환으로 위장 자수한 후 재거의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경 경남 하동에서 활동하던 임봉구(任鳳九)의진에 참여하여 항일의 의지를 다시 펴기 시작하였다. 박홍지는 임봉구의진 소속의 군사들과 함께 하동군 화개하면(花開下面)을 중심으로 전남 광양(光陽) 일대에 걸쳐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군사들과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인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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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지는 고광순, 임봉구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전남 광양일대에서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으며 군연락 책임자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적량면 동점마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다 27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분연히 궐기, 고광순(高光洵)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896년 을미의병 당시에도 거의한 바 있었던 고광순 의병장은 1906년 12월(음력) 전남 창평군(昌平郡) 저산(猪山)에서 다시 거의의 기치를 들었다. 1907년 4월에는 전남 화순(和順)을 점령하고 부일배를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을 축출하는 활발한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동에서 군사 1,000여 명을 소모하여 재출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고광순 의병장이 전사함으로써 의진은 그만 와해되고 말았다. 박홍지는 이와 같은 고광순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은신책의 일환으로 위장 자수한 후 재거의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경 경남 하동에서 활동하던 임봉구(任鳳九)의진에 참여하여 항일의 의지를 다시 펴기 시작하였다. 박홍지는 임봉구의진 소속의 군사들과 함께 하동군 화개하면(花開下面)을 중심으로 전남 광양(光陽) 일대에 걸쳐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군사들과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인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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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지는 고광순, 임봉구의병부대에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전남 광양일대에서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으며 군연락 책임자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적량면 동점마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다 27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분연히 궐기, 고광순(高光洵)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896년 을미의병 당시에도 거의한 바 있었던 고광순 의병장은 1906년 12월(음력) 전남 창평군(昌平郡) 저산(猪山)에서 다시 거의의 기치를 들었다. 1907년 4월에는 전남 화순(和順)을 점령하고 부일배를 응징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을 축출하는 활발한 항일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동에서 군사 1,000여 명을 소모하여 재출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고광순 의병장이 전사함으로써 의진은 그만 와해되고 말았다. 박홍지는 이와 같은 고광순의진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은신책의 일환으로 위장 자수한 후 재거의를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경 경남 하동에서 활동하던 임봉구(任鳳九)의진에 참여하여 항일의 의지를 다시 펴기 시작하였다. 박홍지는 임봉구의진 소속의 군사들과 함께 하동군 화개하면(花開下面)을 중심으로 전남 광양(光陽) 일대에 걸쳐 총기와 탄약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군사들과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인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