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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홍은 박매지의병부대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일진회원을 처단하는데 앞장섰으며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1908년 4월 6일 악양면 입석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양 신흥계곡에서 탈출하다 22세의 나이에 충살됐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김의홍은 1908년경 분연히 궐기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경남 하동일대에서 임봉구(任鳳九)의진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임봉구의병장은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임봉구의진은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의홍은 이러한 임봉구의진을 지원하면서 활동하다가 하동군 악양서면(岳陽西面) 신흥촌(新興村) 부근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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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홍은 박매지의병부대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일진회원을 처단하는데 앞장섰으며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1908년 4월 6일 악양면 입석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양 신흥계곡에서 탈출하다 22세의 나이에 충살됐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김의홍은 1908년경 분연히 궐기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경남 하동일대에서 임봉구(任鳳九)의진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임봉구의병장은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임봉구의진은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의홍은 이러한 임봉구의진을 지원하면서 활동하다가 하동군 악양서면(岳陽西面) 신흥촌(新興村) 부근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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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홍은 박매지의병부대에서 맹활약했다. 그는 특히 일진회원을 처단하는데 앞장섰으며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기도 했다. 1908년 4월 6일 악양면 입석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악양 신흥계곡에서 탈출하다 22세의 나이에 충살됐다. 공훈록 :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대한제국의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동년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김의홍은 1908년경 분연히 궐기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경남 하동일대에서 임봉구(任鳳九)의진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임봉구의병장은 하동군 청암면(靑巖面)을 근거로 인근 각면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임봉구의진은 1908년 4월 하동군 적양동면(赤良東面) 동점촌(銅店村)에서 총기, 탄약 등 군수품을 모집하던 중 일본군 및 순사의 합동수색대와 조우하여 접전을 벌였다. 또한 7월에는 하동군 외횡보면(外橫甫面) 역마내동(驛馬內洞)에서 일신일어학교(日新日語學校)를 습격하여 일본인 교사를 인솔해 온 정우철을 응징하고 교사(校舍)를 소각 전소시켰다. 이어 내횡보면 토덕동(土德洞)에 거주하는 일진회원(一進會員) 장재수를 처단 응징하는 등 일제 침략세력을 일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의홍은 이러한 임봉구의진을 지원하면서 활동하다가 하동군 악양서면(岳陽西面) 신흥촌(新興村) 부근에서 일경에 체포되었고, 틈을 보아 탈출을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