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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6 (제128호) 관향조 종친회 판윤공파는 고려 말 개성판윤(開城判尹)으로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자 경북 성주군 가야산에 은거하며 불사이군(不 事二君)의충절을지킨휘가권(可權)으로부터문호가열린다. 상계를 보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貞)은 증조 부 가 되 고 조 부 는 익 재 이 재 현 선 생 과 근 재 안 축 선 생 등 당 대 의 거유와 종유(從遊)하고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라 청렴 고 결하고 모든 일에 있어 공평하게 처리 하였던 휘 원룡(元龍)이 고, 무과에 급제하여 도첨의시중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 院君)에 봉해진 휘 천상(天祥)은 아버지이다. 평양부원군의 첫 번째 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 원 호(元顥)의 따님이며, 그의 외조부는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다. 후배(後配) 성산이씨(星山李氏)는 경원공(敬 元公) 포(褒)의 따님이자 정당문학의 대가 이조년 선생의 손녀 이다. 판윤공은 기질이 아름답고 뜻이 높았으며 학문이 뛰어나 명 망을 높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을 두루 거치면서 몸 가짐을 조심하고확고하게하여시배(時輩)들과절대 어울리지 않았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에 올랐는데 공의 관직을 따 판윤 공파라한다. 개성판윤공(휘 가권)은 무과에 등제하여 도첨의시중(都僉議 侍中)에 올랐고,공민왕을 공근(恭勤)히 섬겨 평양부원군(平陽 府院君)에오른휘 천상(天祥)의 3남1녀 중셋째아들로 태어났 다.어머니는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옛날 사기(史記)를 읽었는데 충신전(忠臣傳) 이나 효자전(孝子傳)을 볼 때는 개연(慨然)히 경의(敬意)를 표 하여 「남의 신하가 되거나 아들이 된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그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좋은 글귀를 발췌하여삶의지표로삼았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개성판윤에 올라 재임 시 공평 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받았으며,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친(父親, 평양부원군)의 상(喪)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 고 집으로 돌아와 상례(喪禮)를 지키며 3년 상(喪)을 마치므로 효자(孝子)라는칭송이자자했다. 그러나 판윤공은 조정에 있을 때 난리가 날 징조가 엿보이므로 항시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을 가 지고 있었는데 상기(喪期)를 마칠 무렵 국가에 이미 역성혁명(易姓 革命)이 일어나 조선조(朝鮮朝) 가 개국되니 두문동(杜門洞)을 나 와서 조령(鳥嶺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있는 고개)을 넘어 남쪽 가 야산(伽倻山)에 도착하였는데 마 을과 산곡(山谷)이 깊고 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고 그곳에서 여생 을마치기로결심하였다.(서기139 3년) 이때 야은(冶隱)길재(吉再,135 3년~1419년)선생도 일선(一善, 현 구미시)의 금오산(金烏山) 으로 들어가므로 세상 사람들은 길입금오 박입가야(吉入金烏 朴入伽倻)라고 하였다. 가야산은 산벽(山壁)이 만 길이나 되어 공(公)의절의(節義)와같았다. 그리고 깊은 산곡도 그윽하고아름다운데다가 대숲과 잣나무 도 많았으며 방명(坊名, 동네 이름)도 지사(志士)라고 하였으 니그것도우연한일이아니었다.그곳에잡목을베어내고집한 채를 지어 놓고 살면서 상록수를 많이 심어 그 우호(寓號)를 죽 백 리 (竹 柏 里 )라 고 하 였 으 며 , 또 그 가 살 고 있 는 마 을 을 수 륜 동 (修倫洞)이라고 하여 그의 수양이 윤리(倫理)를 지키는데 있음 을 나타냈다.이때 신조(新朝)가 이미 들어서서 은둔한 고사(高 士, 인격이 고결한 선비)를 찾으므로 그의 친족과 친구들은 벼 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판윤공의 경륜(經綸)을 추대하니 태종조(太宗朝,이방원)에서 세 번이나 정경(正卿,정 이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제학 등을 이르는 말)으로 불렀으나 공(公)은 끝까지 나아가 지 않았으며 뷺나는 왕씨(王氏)의 신하인데 어찌 이씨(李氏)에 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뷻라고 함으로 태종은 공의 뜻을 가상 하게생각하여억지로기용하지않았다. 그러나 판윤공은 1426년(세종8년) 임종할 때 유언을 내려 비 갈(碑碣)을 쓸 때 고려의 직함(職啣)을 사용하게 하여 이씨의 신하가아니라는것을보이고,또자제들에게말하기를뷺너희들 은 왕씨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씨의 조정에 나아가서 벼슬을해도 될 것이다.(我爲我王爾爲爾王)뷻라고 하였다. 경상북도 가야산의 불이문(不二門),장구지소(杖 넓之所),지 동암(志同巖)등지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며 은둔한 곳 이며 공(公)의 꿋꿋한 충절을 말해주는 유소(遺所)로 620여 년 의세월속에서도고스란히남아있다. 이에 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士林)에서 덕봉서원 (德峯書院)을 지어 향사(享祀)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에 의해 훼철되고 지금은 유허비와 600여 년을 지켜온 종택(宗 宅,죽백고택)과죽백사(竹柏祠,廟宇)가남아있다. 판윤공의 첫 째 부인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는 야성군(冶城君) 길창(吉昌)의 따님으로 감사(監司) 구( 넣)의 손녀인데 무자녀(無子女)이고 계배(繼配) 남양홍씨(南陽洪 氏)는 판중추(判中樞) 언수(彦修)의 따님으로 부녀자가 지켜 야할 덕행을 두루 갖추어 슬하에 2남(유성,두성)2녀를 두었는 데 장남 유성은 의주목사공파, 차남 두성은 진사공파로 세계를 이룬다. 장남 유성(柳星)은 태종 9년(1409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 터 기질이 특이하고 문무겸전의 재주가 탁월하여 판윤공의 사 랑을 많이 받았다.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 가지 않았으나 판윤공의 유훈을 받들어 출사하였다. 종성부사 (鍾城府使, 현 함경북도 종성군)로 나아가 공평청렴하고 자애 로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은 공덕비를 세워 은혜와 공덕을 칭 송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행색(行色)이 너무 도 소연(蕭然)하여 임금이 그 청렴함을 가상히 여기어 청백리 로 봉하여 단서(丹書)를 내리고 의주목사를 제수하니 더욱 엄 하고 튼튼하게 변방을 방비하고 위민선정(爲民善政)을 베풀었 다.이후 황해도 절도사로 부임도중 병이나 48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0월 1일 무신 1번째 기사(1 449년) ‘평안도 도절제사와 군관을 감량하여환경케 하고 도진 무도 소환하다’ 에 황해도절도사 임명사실이 전해진다. [ 의정부 에서 아뢰기를,뷺이제 듣자오니,야선(也先)의병마가 대동 구자 (大同口子) 밖에 있다 하옵고, 우리나라와 서로 연접(連接)하지 않았으니, 어찌 갑자기 우리의변경으로 침입할 리 있겠습니까. 청하옵건대, 평안도 도절제사와 군관을 감량하여환경(還京)하 게 하옵고, 도진무 박강(朴薑)도 소환하시도록 하되, 박유성(朴 柳星)으로대신하게하소서.뷻하니,그대로따랐다.] 목사공은 인손(仁孫), 예손(禮孫), 신손(信孫) 삼형제를 둠 으로서가문이크게번성하였다. 장남 인손은 승사랑(承仕郞)으로 효우(孝友)가 돈독하고 재 덕을 겸비하였고, 차남 예손은 어모장군충무위부사맹으로 타 고난 효자이다. 부모님 상을 당해 피를 토하듯 슬퍼하며 3년상 을 치르고 1495년 합천 야로 숭산 남교(현 야로면 매안리)로 이 거하여 아들과 사위(한훤당 김굉필)의 학업을 위해 숭산(현 매 안리 989번지)에 소학당(小學堂)을 건립, 이들에게 학문의 대 성을이루게하였다. 삼남 신손의 호는 모헌(慕軒)으로 상서원주부(尙瑞院主簿) 이다. 4세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효(孝) 자(字)의 뜻을 묻 는 등 천성으로 효(孝)가 지극하였다. 아버지 목사공과 모부인 정부인 수주김씨가 병석에 누워 위독할 때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드시게 한 후 10여 일을 연명하게 하는 대효(大孝)로 향리 의 칭송을 받아 관찰사는 그를 효렴(孝廉)으로 아뢰어 주부(主 簿)를 제수하였다. 특히 학문이 깊어 만년에는 경북 군위 의흥 이전동에 살면서 시주(詩酒)를 즐기다가 여생을 마쳤다. 목사 공 후손들은 장남은 승사랑공파(伯派)차남은 사맹공파(仲派), 삼남은주부공파(季派)로각각세계를이룬다. 차남 두성(斗星)은 약관 18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짐작해볼 만하다. 뜻과 기개(氣 槪)가 호탕하여 구차한 속유(俗儒)가 되지 않고,손에 매(鷹)를 들고 다니며 꿩을 사냥하면서 어느 곳이든 가지 않은 곳이 없었 다. 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1436년) 1월 16일 임오 4번째 기사 ‘경상도 감사 박규가 해청 1연을 바치다’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경상도 감사 박규(朴葵)가 해청(海靑) 1연(連)을 바치 니,성주(星州)사람박두성(朴斗星)이잡은것이다.관찰사와성 주목사에게의복을각각한벌씩내리고,두성에게의복,갓과면 포 15필 을 내렸 다 .] 후손들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세계를 이으면서 판윤공파 는 목사공의 삼형제(承仕郞公派, 司猛公派, 主簿公派)와 함께 크게4파로분파되고이후15개지파로구분된다. 승사랑공파는 의주목사공의 장남 휘 인손(仁孫)을 파조로 한 다. 승사랑공 휘 인손은 아들 형제 숙근(淑根)과 숙정(淑禎)을 두었다. 장남 숙근의 호는 야계(倻溪)이며 장사랑(將仕郞)이 다. 지지당 김맹성(조선 전기의 문신, 1437∼1487)에 수학하고,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종유(從遊)하였으며, 기 묘년에현량(賢良)으로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천수를 다하 여향수(享壽)93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다. 아들 탄(坦)은 종사랑이고 손자 대영(大榮)은 금계 황준량(1 517∼1563)과 교유(交遊)하였으며, 통덕랑(通德郞)이고, 경릉 (敬陵) 참봉(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이다. 재주가 높고 기질이 아름다운데다가 효행이 지극하여 무슨 일이든 할 만 하였지만 이어받은 유업(遺業)이 부유하여 공명(功名)을 멀리하고 산수 를좋아했다. 참봉공(휘 대영)은 밀성박씨 소요당 하담(河淡)의 따님과 결 혼하여 아들 이현(而絢)과 이립(而立)을 낳으니 장남 이현의 자(字)는 여수(汝粹),호는 창애(蒼涯)이며 시호(諡號)는 의민 (毅愍)이다. 1544년 4월 14일생으로 재주가 영민하고 지모(智 謀)가 뛰어나 남명 조식 선생의 사랑을 받았다. 동강(東岡) 김 우옹(金宇 죙, 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 0)등과 도의지교를 맺어 서로 시문을 강론하면서 그의 유풍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동쪽 산 밑에다 집 한 채를 지어놓고 그 집 을 창애서실((蒼厓書室)이라 하였으며,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고,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과 강마(講磨)하고 종유하면서경의(敬義)의요지를듣고체인(體認)하였다. 1592년(선조 25년)에 왜적이 침입하자 임금이 용만(龍灣)으 로 거동하니,그가 서생(書生)으로 집에 있다가 국사가 급한 것 을 보 고 의 연 히 살 고 자 하 는 마 음 없 이 집 안 동 생 이 장 ( 而 章 ,용 담공)과 더불어 동지들과 창기(倡起)하였다. 그는 의병대장 김 면(金沔)의 군(軍)에 가담하여 성주(星州) 가천(伽川)에서 많 은 왜적을 무찔렀으나 겨울에 무주로부터 회군하다가 추위와 군세의 부족으로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 다. 1592년(선조 25년)에 왜란으로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특별히공조참의(工曹參議)에증직하였고,사림들은그를덕봉 서원 충렬사에 배향 추모하였다. 1624년에 그의 아들 영서(永 緖)의 사절(死節)로 인하여 1644년(인조 22년)에 공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728년(영조 4년)에 시호가 하사되어 영조 18년(1 742년 청 건륭(乾隆) 7년) 12월 14일 실록을 곁들여 본다. 【증 (贈) 판서(判書) 박이현(朴而絢)에게 의민(毅愍)이란 시호를, 증 판서 박영서(朴永緖)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다. - 중간 생략-박이현은 순천(順天)사람이고,박영서는 그의 셋째 아들이다.박이현은 임진왜란 때 포의(布衣)로 성주(星州)에서 창의(倡義)하여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서로 호 응(呼應)하는 형세를 이루어, 누차 왜적(倭賊)과 싸워 참획(斬 獲)한 것이 많았는데, 군대가 패배하게 되자 죽고 말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하 였다. 박영서는 무과(武科)에 올라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 었으며,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亂) 때 원수(元帥) 장만(張 晩)의 군사를 따라 적(賊)의 후미를 쫓아 황주(黃州)의 신교 (薪橋)에 이르렀는데, 원수의 군사들이 겁을 내어 감히 진격하 지 못하자, 박영서가 홀로 분격(奮擊)하여 용맹을 뽐내며 말을 달려 이괄의 진중(陣中)으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이괄 을 잡을 뻔했는데 갑자기 말이 거꾸러져 잡히니 이괄이 항복을 받고자 하였다.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連)이 또 그의 용력(勇 力 )을 아 껴 감 언 이 설 로 꾀 니 , 박 영 서 가 대 로 (大 怒 )하 여 자 기 손 으 로 타 던 말 을 베 며 , ‘내 가 너 에 게 잡 히 게 된 것 은 이 말 때 문 이 다.’하고,마구꾸짖으면서꺾이지않았다.한명련이또초모(貂 帽)를 그 머리에 씌워주니, 박영서가 머리를 흔들어 초모를 떨 어뜨리며,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역적의 초모로 충신의 머 리를 더럽힐 수는 없다.’ 하였다. 역적들이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긴 칼로 찍어대니 살갗과 살점이 조각조각 땅에 떨어졌는 데,죽을때까지여전히꾸짖는소리가끊어지지아니하였다.인 조(仁祖)가 듣고 탄석(歎惜)해 마지않으며 특별히 병조참판 (兵曹參判)을 증직하고 또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당저 (當콕)을묘년에 사도(四道)의 유생(儒生)들이 함께 그 부자가 사절(死節)한정상을하소연하자 마침내 판서로 더증직하였는 데,이때에와서증시(贈諡)한것이다.】 의민공(휘 이현)은 종서(宗緖), 흥서(興緖), 영서(永緖), 윤 서(潤緖)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종서의 호(號)는 백당(栢 堂)으로 한강 정구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소학(小學)을 지신 (持身)의 법으로 삼았다. 임란이 일어나 아버지 의민공께서 창 의토적에참가하시자어머님을모시고가야산백운산성에서피 난생활을 하시며 서계 김담수, 심원 이육, 죽헌 최항경, 사옹 박 명윤 등 제현들과 교우(交友)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백운동 에는 백당박선생유허지(栢堂朴先生遺虛地)라고 전각된 자연 대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후손들은 백당공의 호를 따 백당공 파(柏堂公派)로성주수륜면에집성촌을이룬다. 차남 흥서는 조산대부 군기시판관으로 따님 한분을 두어 후 사가 없고, 삼남 영서의 호는 주봉(柱峯)이며, 시호는 충장(忠 壯)이다. 뱚파조별약사 순천박씨판윤공파(判尹公派) 순천박씨는 경명왕의왕자 강남대군(諱 彦智)의후 손이라 전한다. 그러나 세수실전(世數失傳)으로 인 해 고려의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 고려 시대 문관의품계 정1품)을 지내고 사후(死後) 해룡 산신(海龍山神)이 되어 전남 순천지방의 수호신으 로 받들어 온 휘 영규(英規 :후백제 견훤의사위)공 (公)을시조로하고있으나이후고려정승으로평양 군(平陽君)에 봉해진 휘 난봉(蘭鳳)과 보문각 대제 학을역임한휘숙정(淑貞,號竹溪)대(代)에이르기 까지 세수실전(世數失傳)으로 인해 휘 숙정(淑貞) 공(公)으로부터기(起)일세(一世)하고있다. 이번호에는불사이군의충절을보인판윤공휘가권 (可權)을파조로하는판윤공파에대해알아본다. 죽백고택(윤동마을).경북 문화재자료 제602호 뱚판윤공파연원(淵源) 뱚판윤공(判尹公)의생애(生涯) 판윤공청풍비. 성주군수륜면오천리도로변. 뱚판윤공(判尹公)의세계(世系)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충신문-경북 문화재자료 제502호 경북 성주군수륜면수륜리477(윤동마을) 승사랑공의 현손 의민공 박이현과 그의 아들 영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정려(旌閭)이다. 뱚7면으로 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