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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5 (제128호) 관향조 종친회 정몽주 문하에서 수학하고,고려 말-조선 초에 왜구 정벌에 활약하여 이조참판과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 摠管) 등을 역임한 무신 박성양(朴成陽)의 학문과 덕 행을 추모하고, 지역민의 교육과 후진양성을 위해 순 조 18년(1818)에 창건되어 철종 2년(1851)에 사액되 었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고 그 뒤 1905년 명곡서당으로 후학양성기관으로 운영되다 1975년 명곡서당을 명곡서원으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 명곡서원이 지난 1일자로 의성군문화유 산제37호로지정되었다. 서원의 배치구성 및 건물 구성은 현존 조선후기 서 원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양 분해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을 취한 점이 특이하다. 건물의 개별적 건축적 특성은 근븡현대적 성향을 보인 다. 건물 구성은 먼저 제향공간에 사당인 경덕사(景德 祠), 전사청(典祀廳), 사주문 3동, 강학공간에는 강당 인 명교당(明敎堂), 동재인 강의재(講義齋), 서재인 향도재(向道齋), 외삼문인 유정문(由正門)4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향공간을 보면, 강학공간 뒤편의 산 사면에 2단으로 터 닦고, 아랫단에 사주문과 전사청 을,윗단에는사당인경덕사를튼븮ㄷ자븯형으로배치했 다. 윗븡아랫단사이에는 석축을 높게 쌓고 3줄의 출입용 계단을설치했다. 경덕사는 정면 3칸, 측면 칸반 규모에 구조는 전퇴 만 이익공이고 그 외는 간략한 민도리이다. 평면은 내 부 3칸통에 바닥을 우물마루로 마감했다.구조는 시멘 트로 마감한 기단에 원형 화강석초석을 놓고 두리기 둥(Ø230㎜)을 세웠다. 구체부는 전퇴에는 벽체 없이 개방하고 본체는 기둥사이에 사방 벽을 치고 전면 3칸 각기에 쌍여닫이 울거미 띠 장널문의 출입문을 달았 다. 지붕가구는 전퇴3량가에 종대공은 동자대공이다. 지붕은 겹처마에 기와를 이은 맞배집이다. 익공의 세 부기법은 근븡현대작이고, 부연개판은 부연과 직교해 깔았다. 전사청은 규모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소규모이 고,구조는3량가에민도리의맞배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 1칸과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구조 는 장여수장한 민도리집이다. 구조는 시멘트기단에 원추형 화강석초석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Ø200) 을세웠다. 기둥과 기둥사이에는 벽을 치고 방의 전면과 청방 간에만 창호를 달아 출입한다. 지붕은 겹처마에 기와 를이은맞배집이다. 강학공간의 명교당은 강당으로 규모는 정면 4칸,측 면 2칸이고, 구조는 소로수장한 민도리집에 5량가이 다. 평면은 전면에 마루를 깐 전퇴를 두고 그 뒤 본체는 중앙 2칸통에 대청을 두고 그 양측칸에 온돌방을 들인 중당협실형이다. 각 방 뒤편에는 반칸 규모의 반침을 두었고, 각 방의 측면에는 전퇴와 연결되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구조는 자연석기단 위에 자연석초석을 놓 고 두리기둥(Ø270㎜)을 세웠다. 한편 대청 정중앙의 두리기둥 초석은 석탑 옥개석을 사용했다. 본체의 기 둥과 기둥사이에는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온돌방 의 창호는 전면에 머름중방 위 쌍여닫이 살문, 측면에 머름중방위에 외여닫이 살문이다.청방간에는 사분합 들문, 대청 후면에는 머름중방 위에 쌍여닫이 울거미 띠장널문을 달았다.지붕가구는 3분변작법의 5량가이 며, 대청 상부의 중도리간에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지 붕은겹처마에기와를이은팔작집이다. 강의재와 향도재는 동븡서재로 규모, 평면, 구조, 지 붕 등에서 동일하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칸반이며, 구조는 전퇴에만 소로수장 한 민도리집에 전퇴5량가 이다. 또 평면도 3칸 모두 온돌방이고, 구조는 자연석 기단에 원형 화강석초석을 놓고 그 위에 전퇴에는 두 리기둥(Ø210㎜)그 외는 네모기둥(160×160㎜)을 세 웠다.다만 창호는 동재의 전면 각 칸에 머름중방 위로 쌍여닫이 살문과 상인방 위에 들창을 두었다. 서재의 전면 창호도 동재와 동일하나 우측 1칸만 사분합들문 을 단 점이 다르다.지붕은 홑처마에 기와를 이은 팔작 집으로동븡서모두동일하다. 솟을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평면은 중앙 에 출입문을 내고 그 양측에 고방과 온돌방 1칸씩을 대칭배열했다. 명곡서원 가는길은 가음면사무소가 있는 장리에서 동쪽으로 금성현서로(68번 도로)를 타고 양지리쪽으 로 1.2㎞정도 가면 도로 좌측편에 명곡서원 입구를 알 리는 표지석이 나온다.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마을 시 멘트포장길로 다시 90m가량 마을로 들어가면 나지막 한 구릉 남동사면에 서원이 동남향으로 자리한다. 서 원 주변으로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주로 전방에 민가가 위치한다. 서원 전방으로는 양지저수지에서 흘러 내린 소하천이 쌍계계곡에서 흘러 내린 쌍계천 에 합수하는 지점이고, 이들 두 천변으로는 넓은 곡간 평야(지밭들)가넓게펼쳐져있어전망이좋다. 한편 명곡서원은 1950년 한국전쟁 시 가음국민학교 임시학교로 2년여 간 운영되기도 하였으며,지난 2015 년 군비 4억여원을 들여 기둥, 서까래 교체 및 번와공 사등대대적인보수가이루어졌다. 금은 박성양 선생은 고려말 28은(隱)의 한분으로 관향은 함양 호는 금은(琴隱), 시호는 정헌공(定憲 公)이다. 태조6년 5월에 왜구가 남해안에 침입하여 백성이 어육을 당하고 있으니 조야(朝野)에서 공론이 뷺박성 양은 문무를 겸전한 용감한 인로서 왜적을 격퇴시키 는 데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오니 등용 하시옵소서뷻하 고천거하자태조는왜구정벌원수로삼았다. 선생은 일신의 영을 위한 소명은 거절하였으나 나 라와 백성을 구휼하는 일이기에 흔쾌히 수락하여 부 산포로 달려가 60일 만에 왜적을 소탕하고 대첩을 거 둬 태조는 뷺3자의 큰 칼로 사직을 안정시키고 한줄기 채찍 끝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네뷻라며 어사시를 하사 하였다. 이후 광주목사, 우군절제사, 우군동지총제, 이조참 판겸 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고 은퇴후 고향으로 돌아 와 제손들을 위시하여 인재양성에 매진하였으며, 고 종 5년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성균관제주 오 위도총부도총관의 증직과 시호를 정헌(定憲)이라고 함께내려졌다. 명곡서원의성군문화유산제37호지정 강학공간과제향시설이분리된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으로배치 명곡서원전경(경북 의성군가음면명곡서원길12) ①경덕사②강당명교당③동재강의재④서재향도재⑤유정문⑥신도비⑦문서고⑧관리사 강당명교당. 동재강의재. 서재향도재. 제향공간경덕사. 밀원문화연구회(회장 근영)는 7 월 26일 국립중앙도서관(서울시 서초구 소재) 세미나실에서 월례 회의를 가졌다. 이날 월례회의는 국립중앙도서관 전시실(본관 1층) 에서 전시중인 “족보 나의 뿌리를 찾아가다”를 관람하고 회원 상호 간에 우리의 뿌리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등 회원들의 족보에 대한 관심도는 매우 높았고 식견 또한 많아서 끝없는 대화가 이어지 며 각자가 후손들에게 뿌리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알려주겠다고 다짐 하면서 본회 창립과 취지에 부합하 는뜻깊은자리가되기도하였다. 이어 밀원문화연구회가 주관하 여 편찬븡발행한 븮겸재(謙齋) 정선 (鄭敾)과 백거(伯擧) 박자진(朴自 振)에 관한 소고(小考)븯의 출판기 념회와 월례강좌가 근영(根榮) 회 장을 비롯하여 많은 회원들이 참석 하여성황리에시작하였다. 근영(根榮) 회장은 편저자인 농 은( 를隱, 박흥학)으로부터 가제본 을 받아 숙독하고, 우리 연구회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책은 꼭 발 간해야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하였 다며, 그 이유로 우리 박문의 도움 으로 훌륭한 인재의 존재와 보물 제585호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 二先生眞蹟帖)의 관련된 내용이었 다고 말하고, 이 자료는 현재 삼성 문화재단에서 고가의 비용을 들여 소유하고 있다며 회원님들께서도 꼭 한 번 읽 어 보 실 것 을 권 유 하 였 다. 월례강좌 강사로는 본회 회원이 자 븮謙齋 鄭 敾과 伯擧 朴自振에 관 한 小考븯의 편저자인 농은( 를隱) 흥학(興學)님의 해설 강의가 이어 졌다.편저자인 농은( 를隱)은 수년 에 걸쳐서 원고 수집과 일부 번역 등 난해한 일을 하게 된 과정과 저 작권 및 소유권의 출처를 정확히 하여 이 책의 원고를 집필한 과정 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특히 국가 보물인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 先生眞蹟帖)의 발문(跋文) 등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것을 생 각하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참고 로 원문의 번역은 국가기관에서 번 역한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덧 붙이고 간략한 해제(解題)를 첨부 한다면서강의를마쳤다. 특히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혹서에 본 출판기념회에 원근 각지 에서 참석하신 원덕사대종회 노영 (魯永) 회장, 준용(準用) 부회장 , 종진 감사와 구산박씨종친회 광대 (光大) 고문 등 많은 분들이 참석 하여 성황리에 마치게 된 것을 깊 이 감사드리고, 이 책이 나오기까 지 아낌없는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 신 회원님들과 고문님, 집행부 임 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이 모든 것이 선조님들의 음덕(蔭德) 이라고 근영(根榮) 회장은 말하였 다. 지난 2012년 삼성문화재단에서 32억원에 낙찰받아 소장하고 있는 희귀본 보물 제585호 『퇴우이선생 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은 퇴 계 이황 선생의 친필수고본(親筆 手稿本)인 ‘회암서필요서(晦菴書 節要序)’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 필 발문(跋文)이 두편이나 들어있 으며, 70대 노경에 든 겸재의 무르 익은 필묵 맛이 푹 배어나는 걸작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네폭이 들어있는 희귀본으로 퇴계 선생의 호에서 ‘퇴(退)’자를 우암 선생의 호 ‘우(尤)’자를 따 『퇴우이선생진 적 첩 ( 退 尤 二 先 生 眞 蹟 帖 ) 이 라 고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백거 박자진 선생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 또한 눈여겨볼만하다. 밀원문화연구회제153차월례회의겸 월례강좌 븮謙齋鄭敾과伯擧朴自振에관한小考븯의출판기념회개최 븮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백거(伯擧) 박자진(朴自振)에 관한 소고(小考)븯 출판기념회에 이어 편저자인 농은 흥학 현종이 해설과 함 께 이 책의원고를집필한 과정을소상히설명하고있다. 박근영회장 편저자박흥학 겸재정선의계상정거(溪上靜居) 박봉준종무부장의사회로 박상일회장이 회의를주재하고있다. 밀 성 박 씨 고 양 선 조 원 당 종 중 회 (회 장 상 일 ) 는 지 난 7 월 2 0 일 본 종 중회 소회의실에서 감사및 이사연 석회의를 갖고 2017년 7월 6일 전 반기 사업결산에 대한 감사결과를 수석 감사인 광선감사로부터 보고 받고결산자료를검토심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임대료 징수방법 의 문 제 점 및 장 기 공 실 의 대 책 과 향후 예상되는 적자운영의 전망에 대하여 어떤 복안이 있는지 있다면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한지적과 흑 자운영을 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 해 달 라 는 당 부 와 함 께 전 반 기 사 업결산에 대해 승인하고 후반기 사 업 및 계 획 에 대 한 설 명 을 듣 고 원 안대로시행할것을의결하였다. 상일 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 해 매사에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협조해준 임원진 모두에게 감사드 린다고 말하고 삼복더위 종원여러 분들의 건강을 기원드린다고 말했 다.뱚 모든 한편 이날 회의를 마친 임 원진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식 사 를 하 며 종 중 발 전 에 대 한 의 견을나누고는모두해산하였다. /박봉준명예기자(경기도고양시지부) 밀성박씨충헌공파경기도고양시원당종중회 2017년도전반기사업결산이사회개최 밀 성 박 씨 고 직 당 공 파 죽 포 공 문 중 은 지난 19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소재 중 바 위 산 장 에서 종원 50 여명이 참석 하고, 행순 고직당공파종친회장, 상섭 좌상공 파대종회 총무가 참석한가운데 하 계수련회를가졌다. 이날 행사는 서울 등 전국에 산 재해 있는 종원들이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여 미래 전망을 밝게 하여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할 것 같다.특 히 종중의 약사를 통해 순창군 청 계마을 입향과 선조님의행장을 자 세히 소개하는 보학강의가 이어져 청년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문중 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 가 운데 근호 문중회장은 원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참석해준 종원여러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우리 종중은 이제 청년들의 보학상식 증 진을 통해 종중의 미래를 설계하고 자 한다며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청년들을 적극 보내 줄 것을당부했다. 이어 성호 고문(의재공 종중회 장)은 격려사를 통해 우리문중은 이제 카페활동을 통해 종원들의 활약상을 알 리고 금전출납을 오픈 하는 등 선진종회의 모 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는 근호 회장의 성실 함과 강한 추진력에서 동반된 것으로 그동안 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 하 고 이 같 은 노 력 에 보답하는 일은 적극 참 여하여 함께하는 것이 라며협조를당부했다. 죽포공 문중은 밀성 박씨 좌상공(휘 椿)의 10세(世)죽 포처사 휘 간형(艮亨)으로부터 문 호가 열린다. 죽포공은 전남 청평 향교 향안을 재정하고 문풍을 크게 일으킨 고직당공 휘 영철(英喆)의 차남으로 선무랑에 오른 휘 정련 (廷 璉 ) 의 아 들 6 형 제 중 다 섯 째 로 1638년(인조16) 전남 창평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유명한 설엽학자(薛燁學子)의 학문을 따 르기 위해 전북 순창군 금과면 대 장리로 이거하면서 순창에 처음 입 향 하 였 다 . 이후 죽포공의 손자 휘 문선(文 善)에 이르러 팔덕면 월곡으로 이 주하여, 죽포공의 7世 휘 경원(慶 元 )이 팔 덕 청 계 죽 림 촌 으 로 이 주 하여지금에이른다. 청계마을에 입향 한 휘 경원은 효성이 출천(出天)하여 어려서부 터 부모님 섬기기를 저녁에는 잠자 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는 등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럽 게보살펴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므로 지극히 비통하게 여겼고,능히 편모(偏母) 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어머 니가 모진 병을 만나 위태로워 백 약이 무효로 생명이 위태로워 곧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리니 금방 회생하여 그 후 10여년을 살다가 또 병이 재발하여 곧 임종하려함에 볼기살을 베어 약과같이 드리니 5 일간 명(命)을 연장하였다. 상사 (喪事)를 당하여 상복을 입고 맨밥 을 먹 으 며 3 년 을 피 눈 물 로 지 냈 다 . 그리고 언제나 기일(忌日)에는 호 곡하여 슬퍼하기를 초상시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 모한것이다. 이에 지방 유림들이 상신(上申) 하여 1905년(고종41) 정려가 내려 지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 부사에증직되었다. 청계마을은 순창설씨와 옥천조 씨 등 토호성씨의 득세에 많은 성 씨들이 이거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죽포공 후순들이 입향이후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학문 과 효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로서 후손들은 선조의 유업을 잇 기 위해 오늘도 명예와 긍지를 품 고정진하고있다.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본부) 밀성박씨고직당공파죽포공문중하계 수련회가져 젊은청년들과어울리며 문중의약사(略史)전해주는유익한시간되어 박근호회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