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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8월31일 목요일 4 (제128호) 기획 두문동서원은 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만수산 두문동에 있 었다. 충절을 이야기하면 먼저 두문동 서원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 서원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出 仕)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의 충유신(忠遺臣) 두문동 72인 및고려말충신을모신곳이다. 현재 두문동 72인의 성명은 모두 전하지는 않고 박문수(朴門 壽),임선미(林先味),조의생(曺義生),성사제(成思齊),민만부 (閔安富), 깁충한(金충漢), 이의(李倚)등 55명의 성명이 전하 고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자 박문수 등 72인이 모 두 이곳에 들어와서 마을 동, 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 놓고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 유래되었고,태조는 고려유신 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에서친히 과장(科場)을 열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경덕궁 앞 고개를 넘어가버려 그 고개를 부조 현(不朝峴)이라 하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이를괘관현(掛冠峴)이라불렀다한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을 행행(行幸)할 때 부조현의 유래를듣고표절사를세우고제사를지내게하고어필로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특별히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라고한데서불러지고있다. 이를 근거로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의 후 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되어창건하였는데 고려 말불사이 군(不事二君)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순절한 박문수를 비롯 55 인 및 정몽주, 이색등 절의를 지킨 고려 말 충신 64현 등 119위 를배향하였다. 사 당 (祠 堂 )은 열 한 칸 을 넷 으 로 나 누 어 서 첫 째 칸 에 는 표 절 사(表節祠)17현인과 두문동 제현을 봉안(奉安)하되 반드시 세 반(班)으로 하였고 또 왼쪽에다 허위(虛位) 하나를 설치하여 두문동의현인으로감추어져드러나지않은64현인들을제사하 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막연하게 두문동 72현이라고만 하여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절반(殉節班), 항절반(抗節班), 정절반 (靖節班)으로 나눠진다는 것인데 이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두문동 서원지, 부조현 비음기, 표절사 치제문, 두문동기적비, 두문동 72현,두문동외 제현 순으로 게재해 본다. 【 본 원 고 는 두 문동의영수 송암 박문수 선생의‘松菴實記(송암실기)부록 두문 동서원관자료를인용하였다.】 우리나라에 서원지(書院誌)가 있는 유래(由來)가 오래되었 는데 대개 서원지란 서원의 실적(實蹟)을 적은 것이니 서원에 지(誌)가 없으면 서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요 지는 있되 실제 를 적지 않아도 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우리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를 편찬한 까닭인데 반드시 실적 (實蹟)에 따라 의심된 것을 보충했으니 거의 천리(天理)에 따 르고 사사로운 마음을 쓰지 않아 차라리 본손(本孫) 자손들에 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사론(士論)의 비난을 받지 않으려 했고 차라리 세속(世俗)의 미움을 받을지언정 이 글을 빠뜨리지 않 아 후세에영원토록 할말이 있게 하려고하였다.나 하영(河永) 이 휴암(休菴)의 후손으로 선조께서 당하신 참혹한 화(禍)에 가슴아파하고 제현의 충성심을 애도하였다. 일찍이 두문동에 들어가 하루 종일 통곡했지만 청산(靑山)은 아무 말이 없고 푸 른 봄풀만 무성하였으니 지나가는 예사 손도 슬픈 노래를 부르 며머뭇거릴터인데하물며그자손된자이겠는가?정조(正租) 임금 때 표절사(表節祠)라 사액(賜額)한 것은 제현(諸賢)을 포 장하는 시초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문헌(文獻)이 민멸(泯滅)하 고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칠십이현 가운데 겨우 일곱 현인만 사적을 알아 제사하였는데 고종조(高宗朝)에 사액서원(賜額書 院)은 훼철 당하고 오직 영조(英祖)의 어필(御筆) 비각만 황폐 한 들풀 가운데 외롭게 우뚝 솟아 있었다.이를 보고 나 하영(河 永)이골짜기에서목을매어죽어조상의발자취를따르고자하 였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못남 이 심하다고 하겠다. 지난 신미년 가을에 두문동 유적(遺蹟)을 끌어안고 혈현단신 북쪽으로 가 송경(松京) 숭양서원(崧陽書 院)에들어가 한두 분동지와함께 두문동 유지(遺址)에다가서 원을 다시 세우기로 의논하여 전국에 글을 보내 칠십이현의 실 적(實蹟)을 찾으니 삼사년 사이에 실적이 답지(沓至)하여 1백 여 현인이나 되게 많았으나 칠십이현의 실적이나 후손은 십분 의 삼사에 불과했으니 당시의 문적(文籍)이 불타 없어지고 자 손이 영락(零落)한 것을알 수있었으니 어찌슬프지않은가.내 가 고루(孤陋)하니 차라리 의심난 부분은 그대로 두어 후세의 군자를 기다릴지언정 어찌 감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거짓으로 지어 칠십이현의 숫자를 채우겠는가 다만 생각하건대 비록 모 두 다 두문동에서 절의를 지킨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늠름 하게 순절하고 굳굳하게 절의를 지킨 풍도(風度)는 족히 사람 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밀고 공경을 표하게 하고 책상을 치고 일 어나외치게할정도로특이하여모두같은때충성을바친현인 들이니 어찌 감히 칠십이현이 아니라 하여 그 실적을 돌려보내 겠는가? 삼가 생각하건대 당일 절의를 지킨 제현이 어찌 모두 두문동의 뜻을 지니지 않았겠는가? 북풍한설에 흩어져 사방으 로가서산에들어가나무를한사람도있고바다로들어가고기 를 잡기도 했으니 어느 산인들 부주산(不周山)이 아니며 어느 물이 영천(潁川)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두문동이라 이름 한 골짜기가 많으니 어느 곳인들 두문동이 아니랴만 제현을 함께 제향한두문동은하늘이허여(許與)한것이아니겠는가?나하 영(河永)이 동지와 함께 두 해 동안 강례(講禮)하면서 비로소 순절반(殉節班) 항절반(抗節班) 정절반(靖節班) 세 반(班)이 잘 나누어져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 방식을 따라서 사당(祠堂)열한 칸을 넷으로나누어서 첫째칸에는표절사(表 節祠)일곱 현인과 두문동 제현을 봉안(奉安)하되 반드시 세반 (班)으로 하였고 또 왼쪽에다 허위(虛位) 하나를 설치하여 두 문동의 현인으로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은 현인들을 제사하니 이는 대개 주빈(主賓)을 나누는 법을 중히 여겨서이다. 나머지 세 칸은 두문동 이외의 제현을 순절반 항절반 정절반의 위(位) 로 분배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리(天理)의 공변됨과 인정의 정 도에 부합된다고 하겠다.아 큰일을 이루셨으니 죽은들 무슨 한 이있겠는가?지난번사람을인하여실례(失禮)한것이매우황 공하오며이미실례되었음을알고바로잡았으니제현의영령께 서도 용서하시리다. 이에 문학동 강영직(姜永直) 김영범(金永 範) 송영귀(宋榮龜) 군으로 하여금 고동(故洞)의 유적을 수집 하게 하고 제현의 실행(實行)을취하여서원지를 편찬하였으니 지가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나 족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빠진 내 용을보태기에충분하리라. 1935년乙亥하한(下澣)순창(淳昌)임하영(林河永)삼가쓰다. 아 금년 신미년(1931년) 다음해 임신년은 두문동 제현께서 두문(杜門)하신해이다. 이에 서원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서울에서 발론(發論)되어 임 하영(林河永) 이장용(李章鎔) 등이 개성(開城)의 사림(士林) 및 본손(本孫) 육십여 명과 함께 숭양서원(崧陽書院)에 모여 취지서를만들어개성으로부터전국에배포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고려말 나라가 바뀌는 즈음에 팔도(八道)가 모두 새나라 조선(朝鮮)에 귀향(歸向)하여 복종했는데 오직 두 문동(杜門洞)칠십이현만이 절의를 지키기로 하여목숨을바쳐 순국(殉國)하여 크나큰 강상(綱常)을 붙드셨습니다. 그 충의 (忠義) 공렬(功烈)의 광명 뇌락(光明 磊落)함은 족히 천지와 같이 크고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하였으니 아 참으로 성대 한일입니다. 조선국왕(영조)은 신하 개성유수 서종급을 보내 두문동에 계 시는 고려의 여러 충신들 영혼께 제사를 드립니다.절의를 지켜 왕조(王朝)를 섬기지 않은 것은 신하의 떳떳한 도리요 충렬(忠 烈)을 포상하는 것은 예전(禮典)에 나타나 있습니다.우리 조선 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은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한 것이어 서 성화(聖化)가 미치자 모두 복종하여 신하가 되었는데도 고 려의 72현만은 신하노릇을 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면서 문에다 두문동(杜門洞)이란편액을걸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며 충절(忠節)을 지키면서 죽을때까지후회할줄을몰랐습니다. 나중에는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고, 앞서는 벼슬을 하지 않 겠다고 관(冠)을 벗어 걸었으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의리 (義理)는마찬가지였으니내소회가어찌끝이있었겠습니까? 사적(事蹟)이 점점 멀어지고 징험(徵驗) 할 만한 문헌이 없 어졌으니후세사람들을권면(勸勉)하려면 어찌포상하는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특별히 큰 글자로 열 네 글자를 써서 비 석(碑石)을 세워 내 뜻을 표합니다. 그 남기신 충렬(忠烈)을 상 상하면서 후손을 찾아 방위(方位)를 점쳐서 단(壇)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니 희생(犧牲)과 제주(祭酒)가 정결하고 향기롭습 니다.백세(百世)를 어찌 멀다고하겠습니까?영원히 그품성을 전할것입니다. 송도지에 실려 있다. 경술년(1790년) 늦봄에 비석을 세웠다. 유수(留守)조원명이 지었다. 고려말에 절의(節義)로 일컫는 자는 문충공 정몽주 야은 길 재 선생 등 몇 현인인데 우리 열성(列聖)께서 정표(旌表)하고 제사를지내높이포상한전례가매우갖추어져있다.이외에는 전하는바가 없고 기타 들리는바 두문동 72현은 충의심이 매우 높았는데 정표(旌表)하고 제사지내는 예가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름들이 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조의생 (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맹씨 성을 가진 사람도 72인 가운 데 든 사람이었는데 그 성명이 전해졌으니 마땅히 드러내어 천 양(闡揚)해야지 인몰(湮沒)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조선이 건 국 된 처 음 에 일 흔 두 분 이 기 꺼 이 귀 화 (歸 化 )하 지 않 고 골 짜 기 밖에다 문을 설치하여 문을 닫고 열지 않았는데 과거(科擧) 에 응시하라고 명하니 채찍을 들고 나가면서 말하기를 ‘나가서 행상(行商)이나 하겠다.’라고 하고 서로 앞다투어 피하여 마침 내 살신성인(殺身成仁)까지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두문동(杜門洞)이라 하 게되었다.그러나이런사실은모두입으로 전해온이야기일뿐 비석을세워기록한바가없어비단그사람들만잊혀질뿐만아 니라그땅까지잊혀져황폐한연기낀텅빈들판만가르킬뿐확 실히알수가없었다.그러나다행히임선미와조의생두현인의 먼 후손이 그곳을 알고 있어 마침내 향리와 의논하어 비석을 세 워 알 게 한 다 . ▲박문수(朴門壽):호(號)는송암(松菴)초명(初名)은문주 (文柱) 개명(改名)은 문수(門壽) 죽산인(竹山人)으로 문강공 (文康公)원(遠)의 아들 공민왕(恭愍王)때 제과(制科)에 급제 하여 벼슬이 우정승(右政丞)에 이르렀다.고려(高麗)의 국운이 다하려 하자 부조현(不朝峴)에 올라가 동지(同志)여러 현인들 과 각자의 뜻을 말하고자 창도(唱導)했다. ▲ 임선미(林先味) : 호(號) 휴암(休菴) 일호(一號) 두문재(杜門齋) 순창인(淳昌 人) 일찍이 낭(郎) 벼슬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태학(太學)에서 거처하였다. ▲ 조의생(曺義生):호(號) 원촌(遠村) 창녕인(昌 寧人) 개성윤(開城尹) 인(仁)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다. ▲ 맹호성(孟好性):호(號) 용호(龍湖) 신창인(新昌人)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임선미(林先味) 조의생 (曺義生)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 성사제(成思齊):호 (號) 두문자(杜門子) 창녕인(昌寧人) 벼슬은 보문각직제 학 (官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 조대운(曺大運):호(號) 산광 (山狂) 창녕인(昌寧人) 문하시중(門下侍中) ▲ 신익지(申翼 之):호(號) 퇴우당(退憂堂) 평산인(平山人) 휴묵재(休默齋) 집( )의 장자(長子)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다.▲신 이(申彛):호(號) 신귀재(愼귀歸齋) 평산인(平山人) 휴묵재(休 默齋) 집의 아들 관(官) 판도판서(判圖判書) ▲ 신 우(申 瑀): 판문하성사(判門下省事) 평산인(平山人) 어사중승(御史中丞) 신 군 평 (申 君 平 )의 아 들 ▲ 국 유 (鞠 循): 호(號)복애(伏崖)담 양인(潭陽人) 상서(尙書) 국량(鞫樑)의 아들 관(官) 호부상서 (戶部尙書) ▲ 고천상(高天祥) : 관(官) 밀직(密直) 개성인(開 城人) 평장사(平章事) 고준(高濬)의 아들 ▲ 심원부(沈元符) : 호(號) 악은(岳隱) 청송인(靑松人)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심룡(沈龍)의 아들 관(官)은 전리판서(典理判書) ▲이 경(李 瓊) : 호(號) 이우당(二憂堂) 하빈인(河濱人) 공민왕(恭愍王) 때 효도로서 목사(牧使)를 제배(除拜)했다.▲서중보(徐仲輔) : 호(號) 적암(積巖) 장성인(長城人) 관(官) 봉정대부(奉正大 夫) ▲ 신 순(申 珣) : 관(官) 직랑(直郞) 평산인(平山人) 어사 중승(御史中丞 신군평(申君平)의 아들 ▲ 신 기(申 淇) : 관 (官) 온수감(溫水監) 평산인(平山人) 불훤재(不 齋)의 종손 (從孫) ▲ 현계생(玄계繼生) : 태학생(太學生) 의창인(義昌人) 동지(同志) 70인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 이상- 이상 17현 (賢)은순절반(殉節班)이다.】 ▲ 김충한(金沖漢) : 호(號) 수은(樹隱) 경주인(慶州人) 관 (官) 예의판서(禮儀判書) ▲ 민안부(閔安富) : 호(號) 농은(農 隱) 여흥인(驪興人) 관(官) 예의판서(禮儀判書) ▲ 이 치(李 致) : 호(號) 어은(漁隱) 합천인(陜川人) 관(官) 부문각제학 (寶文閣提學) ▲ 전귀생(田貴生) : 호(號) 뇌은( 리隱) 담양인 (潭陽人) 관(官) 우찬성겸평장사(右贊成兼平章事) ▲ 이 유 (李 裕) : 호(號) 해은(海隱) 옹진인(甕津人) 관(官) 전객서령 (典客署令) ▲ 구 홍(具 鴻) : 호(號) 송은(松隱) 능성인(綾城 人) 관(官) 시중(侍中) ▲ 곽 추(郭 樞) : 호(號) 앙천재(仰天 齋) 청주인(淸州人) 관(官)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송 인(宋 寅) : 호(號) 송촌(松村) 남양인(南陽人) 관(官) 문하 시중(門下侍中) ▲ 고천우(高天祐) : 도총제(都摠制) 개성인 (開城人) 고천상(高天祥)의 동생 ▲ 전오륜(全五륜) : 호(號) 채미헌(採薇軒) 정선인(旌善人) 관(官) 전법판서(典法判書) ▲ 채귀하(蔡貴河) : 호(號) 다의당(多義堂) 인천인(仁川人) 관(官) 호조전서(戶曹典書) ▲ 박 침(朴 沈) : 전서(典書) 밀양 인(密陽人) 판도판서(判圖判書) 박사경(朴思敬)의 아들 ▲ 이 맹예(李孟藝) : 호(號) 천은(川隱) 옹진인(甕津人) 관(官) 호 조전서 우복야 (戶曹典書 右僕射) 이유(李裕)의 아들 ▲ 변 숙 (邊 肅) : 호(號) 모려(慕麗) 원주인(原州人) 관(官) 호조전서 (戶曹典書) ▲ 조안경(趙安卿) : 호(號) 고죽재(孤竹齋) 함안 인(咸安人) 관(官) 호조전서(戶曹典書) ▲ 서 보(徐 輔) : 호 (號) 신답(新沓) 이천인(利川人) 관(官) 공조전서(工曹典書) ▲박 심(朴 諶):호(號)해은(海隱)면천인(沔川人)관(官)공 조전서(工曹典書) ▲ 박 영(朴 寧) : 호(號) 법촌(法村) 밀양인 (密陽人) 관(官) 공조전서(工曹典書) ▲ 범세동(范世東) : 호 (號) 복애(伏崖) 낭야인(琅 常人) 관(官) 간의(諫議) ▲신 안 (申 晏) : 호(號) 황의옹(黃衣翁) 평산인(平山人) 문안공(文安 公) 신집(申 )의 아들 관(官) 종부시령(宗簿侍令) ▲ 원 선 (元 宣) : 호(號) 양촌(陽村) 원주인(原州人) 관(官) 판삼사좌 윤(判三司左尹) ▲ 조승숙(趙承肅) : 호(號) 덕곡(德谷) 함안 인(咸安人)관(官)저작랑(著作郞)▲신 감(申 鑑) :집현전랑 (集賢殿郞) 평산인(平山人) 황의옹(黃衣翁)의 아들 ▲성 부 (成 溥) : 호(號) 미산(眉山) 창녕인(昌寧人) 관(官) 형부총랑 (刑部摠郞) ▲ 김약시(金若時) : 호(號) 음촌(陰村) 광산인(光 山人) 관(官)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 ▲조유도(曺由道) : 직제학(直提學) 창녕인(昌寧人) 산광(山狂) 조대운(趙大運) 의 아들 ▲도동명(陶東明):호(號)쌍회당(雙檜堂)순천인(順 天人) 관(官) 장령(掌令) ▲임 탁(林 卓) : 감무(監務) 나주인 (羅州人)마침내 나주(羅州)로 돌아가 종신토록 외출하지 않았 다. ▲ 이명성(李明誠) : 호(號) 송은(松隱) 공주인(公州人) 관 (官) 전공판서(典工判書) ▲이 오(李 午) : 호(號) 모은(茅隱) 재령인(載寧人) 관(官) 성균진사(成均進士) ▲ 이수생(李遂 生) : 호(號) 존암(尊庵) 수안인(遂安人) 관(官) 성균진사(成 均進士)【 이상31현(賢)은항절반(抗節班)이다.】 ▲ 배상지(裵尙志) : 호(號) 백죽당(柏竹堂) 흥해인(興海人) 관(官)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변 빈(卞 贇) :문하평리(門 下評理) 초계인(草溪人) 대호군(大護軍) 변경(卞卿)의 아들 ▲ 이유인(李惟仁) : 밀직부사(密直副使) 안성인(安城人) ▲ 채옥택(蔡玉澤) : 영호군(領護軍) 평강인(平康人) 군기감(軍 器監)채양생(蔡陽生)의 아들 ▲최문한(崔文漢):호(號)충재 (忠齋) 강릉인(江陵人) 관(官)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 이 탕휴(李湯休): 영천인(寧川人)관(官)한림학사(翰林學士) 판 서(判書) 이명(李銘)의 아들 ▲ 허 징(許 徵) : 현령(縣令) 양 천인(陽川人) 문과(文科) 관(官) 용진현령(龍津縣令) 【 이상 7 현(賢)은정절반(靖節班)이다.】-순절반(殉節班)항절반(抗節 班) 정절반(靖節班)을 합치면 모두 오십오현(五十五賢)인데 사적이숨겨져드러나지않은분이십칠현(十七賢)이다.- ▲정몽주(鄭夢周):호(號)포은(圃隱)영일인(迎日人)시호 (諡號) 문충(文忠) 문묘(文廟) 에 배향(配享)되었다. ▲ 이숭 인(李崇仁) : 호(號) 도은(陶隱) 성주인(星州人) 시(諡)문충 (文忠) ▲ 이종학(李種學) : 호(號) 인재(麟齋) 한산인(韓山 人)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들 ▲ 신득청(申得淸) : 호 (號) 이유헌(理猷軒) 평산인(平山人) 불설재(不設齋) 신백리 (申百里)의 아들 ▲ 김진양(金震陽) : 호(號) 초옥자(草屋子) 경주인(慶州人) 관(官) 예문관 검열(藝文館儉閱) ▲ 김자수 (金自粹) : 호(號) 상촌(桑村) 경주인(慶州人) 관(官) 정언(正 言) 제주(祭酒) ▲ 손 등(孫 登) : 부사(府事) 밀양인(密陽人) 고려가 망하자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고 말았다. ▲ 하 경(河 귈) : 헌납(獻納) 진주인(晉州人) 고려가 망하자 바위에 머리 를 부딪쳐 죽고 말았다.▲홍 로(洪魯) :호(號)경재(敬齋)부 계인(缶溪人)관(官)한림학사(翰林學士)▲이 초(李 初) :중 낭장(中郎將) 정선인(旌善人)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친하게 지냈다. ▲ 차원부(車元 뽈) : 호(號) 운암(雲巖) 연안인(延安人) 관(官) 정언(正言) 【이상 1 1현(賢)은 순절반(殉節班)이다.】 ▲ 이 색(李 穡) : 호(號) 목은(牧隱) 한산인(韓山人) 가정 (稼亭) 이곡(李穀)의 아들. ▲ 최윤덕(崔允德) : 손암(遜岩) 탐 진인(耽津人)관(官)이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이르렀다. ▲ 최 첨로(崔 老): 호(號) 석계(石溪)경주인(慶州人)관(官)내 시령(內侍令)▲도 응(都 膺) :호(號)청송당(靑松堂)성주인 (星州人)관(官)찬성사(贊成事)▲공 은 : 호(號)고산(孤山) 곡부인(曲阜人) 관(官) 문하시중(門下侍中) ▲ 이중인(李中 人) : 문하시중(門下侍中) 용인인(龍仁人) 송산사(松山祠)에 서 제 향 한 다 ▲ 이 옹 (李 邕 ) : 호 ( 號 ) 조 은 (釣 隱 ) 아 산 인 (牙 山人) 관(官) 문하시중(門下侍中) ▲ 남을진(南乙珍) : 호(號) 병재(丙齋) 의령인(宜寧人) 관(官) 참지문하사(參知門下事) ▲장안세(張安世):호(號)송은(松隱)인동인(仁同人)관(官) 덕령부윤(德令府尹) ▲ 맹희도(孟希道) : 호(號) 동포(東浦) 신창인(新昌人) 관(官) 문과(文科) 한림어사(翰林御史) ▲ 최 양(崔 瀁):호(號) 만륙(晩六) 전주인(全州人) 관(官) 보문대제 학(寶文大提學) ▲ 조 호(趙 瑚):호(號) 회곡(檜谷) 평양인(平 壤人) 관(官) 보문대제학(寶文大提學) ▲ 최유강(최유강) : 호 (號) 두로(杜老) 경주인(慶州人) 관(官) 문하시랑(門下侍郞) ▲ 박덕공(朴德公) : 도총제(都摠制) 죽산인(竹山人) 송암(松 庵) 박문수(朴門壽)의 재종제(再從弟) ▲ 조 열(趙 悅):호(號) 금은( 隱)함안인(咸安人)관(官)공조전서(工曹典書)▲문 익점(文益漸):호(號) 삼우당(三憂堂) 남평인(南平人) 관(官)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 김사렴(金士廉):호(號) 오은 (梧隱) 안동인(安東人) 관(官) 안렴사(按廉使) ▲ 신 우(申 祐) : 호(號) 퇴재(退齋) 아계인(鵝계人) 관(官) 안렴사(按廉 使) ▲ 손효정(孫孝貞) : 좌윤(左尹) 밀양인(密陽人) 태종(太 宗)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이 옥(李 沃) : 절제사(節制使) 양성인(陽城人) 양성군(陽城君) 이춘부(李春 富 ) 의 아 들 ▲ 이 린 (李 璘 ) : 호 ( 號 ) 동 강 (東 岡 ) 원 주 인 (原 州 人)관(官)종부시령(宗簿寺令)▲ 박천익(朴天翊) : 호(號)송 은(松隱)밀양인(密陽人)관(官) 예부시랑(禮部侍郞)▲ 최 이 (崔邇) :호(號)둔옹(遯翁)경주인(慶州人)관(官)온수감(溫 水監) ▲ 조 유(趙 瑜) : 호(號) 건곡(虔谷) 옥천인(玉川人) 관 (官)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 ▲ 옥사온(玉斯溫) : 호(號) 정 은(正隱) 의춘인(宜春人) 관(官)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 허 기(許 麒) : 호(號) 호은(湖隱) 김해인(金海人) 관(官) 중랑 장(中郞將) ▲ 정 희(鄭 熙) : 호(號) 묵은(默隱) 하동인(河東 人) 진현관직제학(進賢館提學) ▲ 서 견(徐 甄) : 호(號) 죽오 (竹塢)이천인(利川人)관(官)장령(掌令)▲윤충보(尹忠輔): 호(號) 여강(驪江) 무송인(茂松人) 진사(進士)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당시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 최 원(崔 原) : 호(號) 보승(保勝) 영원인(永原人) 관(官) 종부시사(宗簿寺 事)▲신포시(申包翅):호(號)호촌(壺村)고령인(高靈人)홍 무(洪武) 계해(癸亥)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다. 원천석(元 天錫) : 호(號) 운곡(耘谷) 원주인(原州人) 성균진사(成均進 士)▲이양소(李陽昭):호(號)금은( 隱)순천인(順天人)임 술(壬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 이상 33현(賢)은 항절반(抗節班)이다.】 ▲ 김 주(金 澍): 호(號) 농암(籠巖) 선산인(善山人) 화사사 전(華海師全) 編輯에 참여하였다. ▲ 나천서(羅天瑞) : 안정백 (安定伯)안정인(安定人)금오산(金烏山)에 은거하였다. ▲민 유(閔 愉):호(號) 사암(思菴) 여흥인(驪興人) 관(官) 찬성사 (贊成事) ▲ 전조생(田租生): 호(號) 경은(耕隱) 담양인(潭陽 人)관(官)찬성사(贊成事)▲김전(金鈿) :호(號)자포옹(自 逋翁) 안동인(安東人) 관(官) 찬성사(贊成事) ▲ 조 공(趙 珙) : 호(號) 삼사(三司) 백천인(白川人) 치악산(雉岳山)에 숨어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 ▲ 전자수(田子壽) : 호(號) 회정(晦亭) 담양인(潭陽人) 문원공(文元公) 전조생(全租生)의 손자 ▲ 노 신(魯 愼):호(號) 악은(岳隱) 함풍인(咸豊人) 관(官) 상호군 (上護軍)▲ 신 아(申 雅): 호(號) 한천자(漢川子)평산인(平山 人) 신익(申翼)의 아들 ▲ 홍 재(洪 載):호(號) 만은(晩隱) 풍 산인(豊山人) 문과(文科) 관(官) 판도판서(版圖判書) ▲ 신덕 린(申德隣):호(號) 순은(醇隱) 고령인(高靈人) 관(官) 예의판 서(禮儀判書) ▲ 맹 유(孟 裕):상서(尙書) 신창인(新昌人) 동 포(東浦)에 은거하였다. ▲ 이춘계(李春啓):상서(尙書) 합천인 (陜川人) 공주(公州) 유성(儒城)에 은거하였다. ▲ 양 우(梁 祐) : 호(號) 묵재(默齋) 남원인(南原人) 관(官) 판도판서(版 圖判書) ▲ 송 교(宋 郊): 호(號) 수운당(睡雲堂) 여산인(礪山 人) 관(官)중정대부(中正大夫) 전의령(典醫令) ▲ 김 륜(金 륜) :호(號)불항(弗降)광산인(光山人)군기시전서(軍器寺典 書) ▲ 선윤지(宣允祉):호(號) 퇴휴당(退休堂) 보성인(寶城 人) 관(官) 문연각학사 (文淵閣學士) ▲ 민유의(閔由誼) : 호 (號) 어은(漁隱)여양인(驪陽人) 관(官) 한림학사(翰林學士) ▲ 이 수(李 蓚): 사인(舍人) 경주인(慶州人)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의 넷째아들 ▲ 민보문(閔普文):군사(郡事) 여 흥인(驪興人)고려가 말하자 송은(松隱)구홍(具鴻)과 함께 배 록동(排祿洞)으로 들어갔다. 【이상20현(賢)은정절반(靖節班) 이다】 -순절반(殉節班)과 정절반(靖節班)을 합쳐 두문동외제현은 6 4현(賢)이다.-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뱚서원 탐방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사우(祠宇) 뱚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서문(序文) 뱚두문서원(杜門書院)을창건한 실적(實蹟) 뱚두문서원(杜門書院)창건취지서(趣旨書) 뱚치제문(致祭文) 1751년10월20일 표절사(表節祠)·어필비각(御筆碑閣) 뱚두문동기적비(杜門洞記蹟碑) 뱚두문동(杜門洞)칠십이현(七十二賢) 뱚두문동외제현(杜門洞外諸賢) ★표절사 건립당시 72현을 조사할 때 당시의문적(文 籍)이 불타 없어지고 자손이 나타나지 않은 17명의현 인을 확인할 수 없어 서원지에 55명의 이름만 전해지 고있어서원지에따라기재하였음을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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