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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7월31일 월요일 7 (제127호) 특집 경애왕죽음은당시후삼국지배자들간공통된이해관계의 일치가빚은참극이었다.저돌적인성정의경애왕은왕건에게 거북한 존재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그 결과 후삼국 시대 미 묘한 역관계로 인하여 경애왕은 견훤은 물론 왕건으로부터도 일정한거리감이생겼다고여겨진다. 926년 여름 4월, 경애왕이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해 말하였 다.“견훤은맹세를어기고군사를일으켰으니하늘이절대돕 지않을것입니다.만약대왕이북을한번치는위세만떨쳐도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할 것입니다.” 태조(왕건)가 사신 에게말하였다.“나는견훤을두려워하는것이아니라,악(惡) 이 가득 차서 저절로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삼국사 기븯신라본기12경애왕3년4월조) 위의 기록은 926년 4월, 그러니까 대략 경애왕이 죽기 1년 반 전의 일이었다.여기서 경애왕은 왕건을 향하여 ‘대왕’이라 호칭하고 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호칭에 주로 주목 하여 왔다. 하지만 핵심은 후반에 있는데, 왕건을 향하여 ‘대 왕’이라 한 것은 단지 정치, 외교적 수사에 그치는 것으로서, 경애왕의 진의는 그 뒷부분에 있은 셈이다. 실제로 경애왕은 고려 군사의 진퇴 문제, 대외 관계 문제에 직접 개입하려 했 다.이점에서왕건의적잖은반발을초래할여지가있었다.그 것은 왕건이 경애왕의 충고를 전혀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 에서도 확인된다. 왕건과 경애왕의 엇박자는 외교적 수사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제 동맹국 사이에서 오갈 내용으로 믿기 힘든파열음이아닐수없다. 신라내에서도경애왕거세를노리는세력이존재하고있었 다. 특히 김부는 문성왕의 6세손, 헌강왕의 외손으로 친가 및 외가 모두 김씨로서의 정통성을 옹유하고 있었다 김창겸, 븮신라 하대왕위계승연구븯, 경인문화사, 2003, p. 89. 외가만 김씨인 경애왕 에 비해 더욱 우월한 정통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왕위계승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김부의 가슴 속 품은 원한이 깊고 절실하였다고 보인다.또 당시 형세로 보아, 김부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절대 왕위에 도전,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떤 무리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 기도하였다.견훤이 경애왕죽음직후왕건에게보낸서한에서,김부의 출자를거론하며박씨왕계와연결짓고있는사실,더욱이 경명왕과의관 계를 헌강왕과의 관계보다 앞세운 점(‘遂奉景明王之表弟 獻康王之外孫’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견훤 및 븮삼국유사븯권2 기이2후백제 견훤조에 공 히인용된‘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은유의미한 일로서, 당시민심의 추이가박씨왕계를참칭하지않으면안 될정도로 박씨왕권에경도되어 있은결과를반영한 증거가아닌가판단된다. 결국김부가명분과 대의를 앞세워정상적으로 왕위를차지할개연성은극히희박했다고보인다.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진 박씨 왕계에서 보이듯, 국내의 민심과 세력 상황에서 김부는 결코 정상적인 수순을 거쳐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 봉착하였다. 이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복수심을 내면에 품고 있었기에 견훤의 요구, 가령 내응(경애왕 시해의 Standing Order)과 같은 사 안에도 순응할 인물로 비쳐졌다고 보인다. 경애왕 시해 이후 김부가 권지국사로 추대된 것에서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 4년 11월조, 최대의 수혜자=김부 자신이라는 점도 매력적 인요소의하나,동인이었다고보인다. 견훤 역시 차도살인의 전술을 동원, 활용했다. 견훤은 자신 에게 적대적인 경애왕을 제거하고, 이어 친견훤의 괴뢰 정권 을 수립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다만 시해의 원죄에서 자유 롭고자김부와같은내응세력을활용하였다. 왕건과 견훤은 모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도 경애왕을 제거, 실익을 챙기고 국면의 전환과 재편을 도모했 던셈이된다.이렇게보면경애왕은당시삼국의유력세력모 두, 당대의 시대 상황에서 철저히 버림당한 비운의 신라왕이 었다. 포석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주흥과 연회의 장소로 익히 알려져 있다.927년 견훤의 침입이 목전에 임박했던 일촉 즉발의 비상 상황에서, 경애왕이 군비를 감독하고 군심을 다 잡고 군사를 독려하며 사위를 경계하기는커녕, 희희낙락 술 과 여자에 빠져 해롱거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희대의 장소로 회자되어왔기때문이다.이를테면,‘포석정=비운의장소’,‘포 석정=주흥의장소’라는시각이오랫동안굳어진해석이었다. <표1> 위의 <표 1>을 보면,븮삼국사기븯에서 포석정은 2회만 나타나 고, 모두 경애왕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븮삼국사기븯는 포석정 과 관련한 기록 2곳 모두에서 이러한 내용을 싣고 있어 븮삼국사 기븯 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조, 소 위 포석정=비운의 장소,포석정=주흥의 장소라는 등식에 뚜렷한 근거를제공한주인(主因)인셈이다. 이러한 논지를 바탕삼아, 경애왕은 무시로 포석정을 방문, 주흥과 여색에 탐닉한 것으로 묘사한 기록마저 보인다븮증보문 헌비고븯 권245 藝文考4 御製 신라편, 븮증보문헌비고븯 권106 속부악1 . 한 데 븮삼국유사븯는 븮삼국사기븯의 기록에 더하여, 포석정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두 차례,곧 나-2)③,나-2)④에 걸쳐 제시하고 있어,묘한울림을준다. 까 닭 에 나 - 2 ) ③ , 나 - 2 ) ④ 는 포 석 정 에 관 한 한 , 일 연 만 의 독 특한 역사 해석이 담겨 있다고 믿어진다. 일연은 왜 븮삼국사 기븯와는 다른 포석정 관련 기록을 븮삼국유사븯속에 추가하여 남겼을까.이를 통해 일연은 대체 포석정에 대해 무엇을 알리 고 싶어 한 것일까.이러한 의구심은 경애왕의 죽음과 연관된 포석정의 실체를 풀어나감에 있어 주된 열쇠가 아닌가 여겨 진다. 한데 세간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포석정 자체는 경애 왕이 죽은 곳은 아니다. 경애왕이 죽은 곳은 다양하게 나타나 고 있 으 나 , 포 석 정 은 거 론 되 고 있 지 않 다 1)백제 軍中(拘致軍中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 11월조; 븮三國遺事븯 권2기이2김 부대왕조), 2)不明(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 한’). 3)포석정(‘弑王于鮑石亭’ 븮 동사강목븯5하 경애왕 4년). 경애왕의 마 지막 동선은세갈래로 정리된다. 다만 븮동사강목븯만이 경애왕이 죽 은 곳이 포석정이라고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 븮동사강목 븯은조선시대후기의저작이므로액면그대로믿긴어렵다. 정확히 말하여 포석정은 신라 55대 경애왕의 운명을 가른 장소라고 보아야 한다. 븮포석정븯은 븮시림븯과 더불어 주목되는 곳이다.포석정은 븮삼국사기븯에 2곳,삼국유사에는 4곳에 걸쳐 언급되고있다. 경애왕의 최후 장소가 크게 엇갈리기 때문에, 포석정은 신 라 55대 경애왕의 비극적 운명을 결정지은 장소, 경애왕의 운 명, 명암이 엇갈린 문제적 장소였다고 봄이 옳다고 여겨진다. 포석정은 927년 견훤의 침입 당시 경애왕의 최종 목적지가 아 니라경유지가아니었던가보인다. 927년 견훤의 침입을 목전에 둔 시점임을 감안할 때, ‘포석 정=주흥의 장소’였다는 주장 역시 의심스럽다. 927년 정월 3 일, 경애왕은 왕건과 연합하여 경북 축산(용주) 공격에 나섰 고, 심지어 왕건은 927년 8월 8월까지 문경에 체류하며 후백 제와 대치하였고,이후 견훤의 반격이 재개되고 있던,격전 상 황이었다. 또한 경애왕이 이전 수차에 걸쳐 견훤을 비난하고 일방적으로 왕건을 편들고 거들었던 점, 견훤을 자극, 견제하 는 선봉에 경애왕의 역할이 있었던 점, 927년 9월부터 견훤의 대반격이 전개된 점, 직후 견훤이 왕건 진영이 아닌 경애왕이 있는 서라벌로 예봉을 급선회한 점, 견훤이 서라벌을 호시하 며 고울부(영천)에 둔영을 꾸리고 서라벌에 대한 誓, 喩로 표 현된 심리전을 감행하고 있었던 점 등, 당시 경애왕은 초미의 상황에직면한상태였다. 소위 국가 안보의 최대 위협상황의 도래, 적정을 감시하고 전원 제 위치로의 신속한 복귀,눈과 귀를 열고 전열을 가다듬 어야 할 태세,현재로 치면 ‘진돗개’ 하나,‘Defcon’ 1, ‘Watch con ’ 1의 상황임에도, 경애왕이 왕성인 월성을 버리고 인근의 남산 기슭에서 비빈으로 표현된 미녀들, 군신종척들로 표현 된 신하, 척족들과 초연히 술파티를 열었다는 것, 또 이처럼 전쟁을 의식하지 않은 채 주연을 베풀던 중 무방비 상태로 견 훤에게 당했다는, 이른바 ‘Blitz attack'이 있었다는 것은 군 사와 전쟁, 전략과 전술, 인간 심리 등 어느 기준에 비춰보아 도믿기힘든,황당함그자체이다. 이른바 포석정은 ‘鮑石+亭’의 복합어로서,일단 ‘전복’모양 의조형물+인근의정자가조성되어있었음이짐작된다. 포석정이 언제부터 포석정이라 불렸는지, 언제부터 조성되 었는지는 불명이다. 포석정 기록이 등장하는 최초라 할 수 있 는 것은 헌강왕과 관련해서이다. 헌강왕은 포석정에 행차하 여, 산신을 따라 춤을 췄으며, 산신의 형상을 공인에게 새겨 조성토록 하였다. 까닭에 포석정 경내에는 헌강왕의 명령에 의하여 제작된 화상석이 헌강왕 치세 이후부터 있었다. 근래 의 시 굴 조 사경주문화재연구소, 븮포석정모형전시관부지 시굴조사보 고서븯2003, pp. 56~57를 바탕으로 포석정 경내에는 정자나 화상 석 외에, 포석사(鮑石祠), 충렬묘(忠烈廟)와 같은 사당라는 사당이 있었다 강돈구, 븮포석정의 종교사적 이해븯, 븮한국사상사학븯4ㆍ5 합집,1993,pp.65~66.전기웅,븮진성여왕대의 화랑효종과 효녀지은 설 화븯,븮한국민족문화연구븯25,2005, pp 212~213. 필사본 븮화랑세기븯를취신 하는 일부 논자들은 포석정 내에 포(석)사가 있었고, 화랑문노 또는 호국 을비는행위가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주장하고있다. 그 진실성은심히 의심스러우나,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진평 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갔다’.(븮화랑세기븯8세 풍 월주문노), ‘포석사(鮑石祠)에화상을모셨다’. (븮화랑세기븯8세풍월주문 노), ‘태후는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 (吉 禮)를 행했다’. (븮화랑세기븯 12세 풍월주 보리공), ‘포사(鮑祠)에서 길례(吉 禮)를 행했다’. (븮화랑세기븯 18세 풍월주 춘추공). 그렇다면 포석사라는 사 당이 이미 진평왕치세에보이고있다는셈인데,향후①포석사는언제설 치되었는가,②왜『삼국사기』에서는포석사라하지않고포석정으로 기 록하였는지의 문제도 중요하다. 는 견해도 피력되었다. 포석사와 충 렬사가있었다면헌강왕은왜제사를지내지않고춤을췄을까 하는의문 이 제기된다. 포석정이 접신의장소로서신성함을유지하게된것은결국 헌강왕때로부터라봄이 옳다고본다. 더욱 헌강왕은경애왕의외조였기 에,경애왕은외조가벌인행적의의미를마음에담았다고짐작된다. 또 포석정 좌우에는 기원, 실제 등 2개의 사찰이 마주보고 있었고 무성한 수풀, 넝쿨이 포석정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崔 匡裕,븮鮑石亭 奏樂詞븯,븮동경통지븯,권7,궁실 이궁혹은후궁으로표현된별궁역시포석정에서남쪽으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고 추단된다.븮삼국사기븯 신라본기12경애 왕4년11월조,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조, 븮三國遺事븯 권2기이2김부 대왕조 포석정에서 공간을 조금 넓혀 보면, 북쪽으로는 멀지않은 지점에 나정, 다시 포석정 동쪽 기슭에는 남산 신성이 위치하 여있었다. 이 상 의 포 석 정 에 관 한 접 근 은 지 금 까 지 대 략 두 가 지 로 압 축된다. 1)포석정=주흥의 장소라는 맥락 崔珉熙, 븮鮑石亭의 연회 장설과 수리학적고찰븯, 븮慶州文化븯8,경주문화원,2002, pp. 216~249 에 서 포석의 형태 洪思俊, 븮慶州鮑石亭의 名稱과 實物븯, 븮考古美術븯129· 130號, 1976.6, pp. 155-161. , 외 관 尹國炳,븮慶州鮑石亭에관한 연구븯, 븮韓國庭苑學會誌븯2호, 1983, pp. 1-13, 양 식 劉東勳, 븮鮑石亭 水理構造 의理解븯, 븮科技考古硏究創刊號븯,1996,pp.113~129 , 기 능 蔣根植,븮慶 州 鮑石亭 流觴曲水에關한 流體科學的 考察븯, 븮美術資料븯 46, 1990, pp. 101-110.장근식,심은보,븮포석정흐름의역사적,과학적고찰븯, 븮한국전산 유체공학회 학술대회논문집 1996년도 춘계븯, 1996.5, pp. 4-26. 등에 주 로 관심을 기울이거나, 2)포석정=포석사라는 맥락에서 팔관 회 강돈구, 븮포석정의종교사적이해븯, 븮한국사상사학븯 4ㆍ5합집, 1993, p p. 65-66,불계( 삔긔) 정우락, 븮포석정혹은신라의빛과 그늘븯, 븮남명원 보븯,2003,p.9.이종욱 역주,븮화랑세기,소나무출판사,1999,p.31및p1 03의 주113, 제천행사 강돈구, 븮포석정은 제천사지 祭天祠址였다븯, 븮신 라의 멸망과 마의태자의 광복운동븯 1999,신라사연구소 pp. 5-6. 조유전, 이기환, 븮한국사 미스테리븯, 황금부엉이, 2004, p. 146.의 장소로 파악, 인식하려는내용이다. 대략, 전자는 유구(遺構)를 토대로, 후자는 주로 븮화랑세기 븯 , 븮각간선생실기븯등 문헌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믿어진다.한 데 경애왕 최후에 관한 한,1)은 포석정 경내 여러 건축물들을 도외시한 채, 주로 포석에 초점을 두어 말 그대로 돌멩이들의 연구에 천착한 것에 다름없는 것으로서 미술, 건축, 지질학의 영역에서 합당할지언정, 포석정의 완전한 역사적 의미를 드 러내고 전후 맥락을 밝혀낼 수는 없다고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유구의 크기를 관찰하면, 장엄한 역사적 유물이기보다 유치원생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는, 마치 소꿉놀이 소품을 보는 듯하다. 927년 경애왕의 포석정 유행 당시 비빈종척을 거느린 대규모였던 점을 고려할 때,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작은 유구를 앞에 두고, 꽃과 수목의 이파리들마저 조락하 여삭막한 주위경관을적나라하게드러낸한겨울,일부러대규모인원을 대동하여술을홀짝거렸다는것은맥락이 닿지않는다. 따라서현재의유 구를근거로 한 연구가유의미한 결실을거둘 수있을지심히의문이다. 2) 역시 포석정=포석사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경애왕의 최후 행적을 추단, 설명하고 있다. 927년 경애왕은 포석정에 서 주연을 연 것이 아니라,전몰장병 추모와 관련이 있는 팔관 회,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일련의 불계( 삔긔 ),혹은 제천 행사를 열었다는 것이다. 한데 적어도 927년 포석정에서 일어 난 상황, 포석정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포석정→경애 왕 최후가 아니라, 거꾸로 경애왕의 최후→포석정에로 접근 하는 역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판단된다. 곧 경애왕을 중심 (경애왕의 동선, 최후 등)삼아 포석정에 접근할 때에, 927년 당시 포석정에 숨겨진 의미, 정치 역학적 구도와 관계를 분석 할 수 있다고 보인다.그러한 맥락 속에서 포석정의 실체도 더 욱분명하여질것이라생각한다. 견훤의 입장에선 항용 자신을 주적으로 인식, 견제하고 있 는 경애왕의 제거가 절실했다.한편,박씨 세력을 제거하고 왕 권을 탈점하기 위해선 강력한 외원과 돌파구가 필요했던 김 부로선견훤과의연대야말로환영할만한것이었다. 김부와 견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공동의 적인 경 애왕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끝없는 위기로 몰아, 사지(死地)조차 가지 않을 수 없게끔 살벌함을 조장하 였다. 반면 김부는, 모름지기 생존이란 무거운 현실적 주제를 앞에 두고 파천, 혹은 활로를 모색하다 마침내는 포석정이라 고 하는 죽음의 덫에 에움당한 경애왕을 직접 거세하는 사명 을 수행했다고 보인다 견훤이 자신은 경애왕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고왕건에게자신있게천명한 대목(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및븮삼국 유사븯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은 이러한 맥락에서설득력을지닌다고보인다. 말하자면 밖은 견훤이, 안은 김부가 영역을 할당하여, 경애왕을 몰아 유인, 제거했을 개연성이 높아지는 셈이다. 븮 삼국사기븯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11월 조에 의하면, 견훤의 동선은 고울부(영천)→시림→왕궁→백제 군영 등으 로 정리된다. 경애왕을 주적으로 여겨 죽일 정도로 극한의 분노에 찼고, 그 결과 거병과 친정까지감행한 견훤이 가장결정적순간에왜직접군사 를 거느리고 포석정을 포위, 진격하는 대신 신라 왕궁에 거했던 것일까. 그것은 견훤이 경애왕 시해의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 만들기였다고보인다. 또군사들에게경애왕을찾게한 것역시견훤의서 라벌 침입이 백주가 아닌 야간이었음을 드러낸다. 수목의 이파리가 땅에 떨어져 사방이 훤히 보인 상태에서, 야간이 아니라면 경애왕의 행적을 놓 칠 하 등의 이 유가 없기 때문이 다. 이와 관련,김부의 고백이 주목된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 경순왕5년2월조. 왕건을향하여김부가“모든화란을내가불러들였다” 는고백은견훤의입김이 강해지게된단초, 곧927년경애왕의죽음과 포 석정사건및김부 자신의책응을지칭하는것으로서, 눈물 섞인이 단 한 마디의 고백이야말로 함의하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븮삼국사기븯 권50 열 전10 견훤, 박순교, 븮신라 景哀王의 ‘포석정 遊幸과 죽음’에 관한 是非 검 토-일연의븮삼국유사븯를중심으로븣븯,븮인문연구븯78,2016.p.91.). 견훤의후광을배경으로집권에성공한김부가졸지에견훤 을 버리고 왕건을 끌어들인 대목, 김부가 자신의 정치적 뒷배 인 견훤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그의 죄악을 싸잡아 비판하는 대목, 군신과 더불어 눈물을 흘리는 대목은 눈여겨볼 부분이 아닐수없다. 요컨대 김부의 행위 전반은 견훤과의 절연(絶緣)을 공포하 고 왕건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대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 해 달라는 절절한 읍소처럼 보인다 지금까지는 김부의 고백을 쇠 락을맞이한 신라의왕이 보이는자조감과 무력감의일단이라해석하여 왔다. 한데 이 대목이야말로 자신이 견훤과의 내응을 고백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침치화란’ 역시 ‘점차 화란을 불러들였다’는 것으로 견훤과 김부의내응과 조율을뚜렷이 고백하는것이라여겨진다.이것은친견훤, 친백제의입장을취한 김부 자신의전력을왕건앞에서참회,반성하는대 목이라보인다. 견훤과의내응사실을왕건에게토로하고눈물로써왕건 의이해를구하는것과 동시에,견훤의악행을싸잡아비난함으로써향후 친왕건의 노선을 택하겠다는 선포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만 왕건의 방문 목적, 김부의 목적과 결부하여 위 기록의 문면이 정확하게 읽혀진 다. 927년, 김부가 견훤과 내응하였다면, 둘 사이에는 경애왕 거세를 위한 ‘거세(참수) 시나리오’의 면밀한 설계가 짜였다 고보인다.이 경우가장 중요한 항목은,시간(DDay)과장소, 수순(How,When,Where)일것이다. 결국 경애왕의 포석정 유행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며, 경애 왕의 최후 동선, 각 행위의 시점, 포석정, 이궁(후궁)이라는 장소 등을 눈여겨 볼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일단의 호위무사 조차 없이, 왕궁에서 멀찍이 떨어진 포석정에, 절색의 여자들 만이 아닌 비빈종척의 대단위 인원, 수많은 눈과 귀까지 거느 리고 포석정에 갔다는 것 역시 '술판‘이라는 것과 도시 어울리 지않는것으로서,합리적의심의여지를북돋운다. 븮삼국사기븯에 의하면 신라 경애왕은 포석정에 ‘出遊’했고, 그 사이 견훤은 서라벌 왕도를 침입하였다 ‘時王與夫人嬪御出遊 鮑石亭,置酒娛樂.賊至狼狽不知所爲,’(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이러한 파국은 경애왕이 평소 흥건한 주흥에 젖어 국가 방 어를 소홀히 함에 기인한 불가피한 결과이거나, 혹은 견훤이 경애왕의 포석정 출유를 틈타 기습 침공을 감행한 성공적인 작전의승리,전술의개가로해석될여지를남긴다. 한데 927년 당시,견훤은 고울부(영천)에 둔영을 꾸리고 서 라벌왕도를노리고있었으며,신라의조야에심리전을행하는 등(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및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 인용 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 여느 상황과 확연히 대비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븮삼국사기 븯기록에 남겨진 경애왕의 행위 전반(포석정에서의 술판, 군비 와 경계의 만홀 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경애왕은 견훤에 의하여 모종의 장소에서 죽임당하였다 고 알 려 졌 고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난정과황음의군주라는 오명을뒤집어쓴채,지금껏인구에회자되어왔다. 한데 븮삼국유사븯는 이러한 븮삼국사기븯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비치고 있다. 븮삼국유사븯는 당시 상황을 서술하면서, ‘견훤의 시림 卒入’, ‘경애왕의 포석정 출유’의 순서로 적고 있다. ‘ 進軍 族始林.[一云鷄林西郊]卒入新羅王都 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븮삼국유 사븯권2 기이2 후백제 견훤). 이러한 문면대로라면, 견훤이 왕도에 침입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경애왕이 서둘러 포석정에 출유했던 셈이 된다. 븮삼국사기븯기록들에서 경애왕 사인과 시 해 주 체①견훤에 의한 逼殺(逼令王自盡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4년11월조; 븮三國遺事븯 권2기이2김부대왕조), ②견훤에의한 타 살(弑王于鮑石亭 (븮동사강목븯 5하 경애왕 4년); 至前 컴 之(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견훤; 斬戮君王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 낸 답서’ ) ③ 3자에 의한 타살(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 ‘견훤이 왕건 에게보낸서한’중)등이다.,죽음의장소 1)백제軍中(拘致軍中븮삼국사 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11월조; 븮三國遺事븯 권2 기이2 김부대왕 조), 2)不明(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 ‘견훤이 왕건에게보낸 서한’). 3) 포석정(‘弑王于鮑石亭’븮동사강목븯5하 경애왕4년).경애왕의마지막 동선 은세갈래로 정리된다.,죽음의시기 견훤이 왕도에침입한 것에대해서 는, 9월[븮고려사븯 권1세가1태조신성대왕10년9월조), (븮고려사절요븯 태조 10년9월조],10월[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11월[븮삼국사기븯권12신라 본기12경애왕 4년조, 븮삼국유사븯 기이2김부대왕조]로 되어 있다. 등 경 애왕 최후와 관련된 적잖은 상이, 혼선이 드러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이에 경애왕의 포석정 출유,경애왕의 최 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 결과 븮삼국사기븯의 기록과 달리 경애왕 죽음의 수수께끼 이면에 단 순히 경애왕 자신의 방종과 주흥이 아닌,신라 내 왕권에 저항 하던 세력과 견훤 사이의 긴밀한 내응, 준동이 개재했을 개연 성이지적되어왔다.조범환,븮신라말 박씨왕의등장과 그 정치적성격 븯 , 1991, pp.19~20, 이명식, 븮신라말 박씨왕대의전개와몰락븯, 2006, pp. 22~23,신호철,븮후백제견훤정권연구』,pp.116~122. 그 논지의 대강은 김부가 후백제의 견훤과 사전 내응, 포석 정 잔치를 기획해 경애왕을 유인, 제거했다는 것으로 요약된 다. 다만 927년 당시 견훤의 적침을 앞에 둔 초미의 상황에서 과연 포석정에서 잔치가 열렸을지, 누가 봐도 생뚱맞은 그런 잔치에경애왕이과연섣불리행차했을지는심히의문이다. 위기에 처한 경애왕을 유인할 ‘달콤한 유혹’으론 뭔가 설명 과 묘사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생존이 란 무거운 현실적 주제를 앞에 두고 파천, 혹은 연대의 한 방 편으로 경애왕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유인, 제거했다는 상 정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순교, 븮신라 景哀王의 죽 음과 견훤ㆍ왕건의공방븯,븮동아인문학븯37, 2016. pp.515~556)말하자면 경애왕 거세를 위한 고도의 전략, 전술이 동원되었던 셈이 된 다. 기실김부는문성왕의6세손,헌강왕의외손으로친가및외 가 모두 김씨로서의 정통성을 옹유하고 있었다. 김창겸, 븮신라하 대왕위계승연구븯,경인문화사,2003,p.89. 외가만김씨인경애왕에비해더욱우월한정통성을지녔다 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왕위계승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는 점에서 김부의 가슴 속 품은 원한이 깊고 절실하였다고 보 인다. 또 당시 형세로 보아, 김부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절대 왕위에 도전,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존재로서,어떤 무리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였다. 견훤이 경애왕죽음직후 왕건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부의 출자를 거론하며 박씨 왕계와 연결짓고 있는 사실, 더욱이 경명왕과의 관계를 헌강왕과의 관계보다 앞세운 점 (‘遂奉景明王之表弟 獻康王之外孫’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및 븮삼 국유사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 한’)은유의미한 일로서, 당시민심의추이가박씨왕계를참칭하지않으 면안 될정도로 박씨왕권에경도되어있은결과를반영한 증거가아닌가 판단된다. 결국김부가명분과 대의를앞세워정상적으로 왕위를차지할 개연성은극히희박했다고보인다.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진 박씨 왕계에서 보이듯, 국내의 민심과 세력 상황에서 김부는 결코 정상적인 수순을 거쳐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 봉착하였다. 이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복수심을 내면에 품고 있었기에 견훤의 요구, 가령 내응(경애왕 시해의 Standing Order)과 같은 사 안에도 순응할 인물로 비쳐졌다고 보인다. 경애왕 시해 이후 김부가 권지국사로 추대된 것에서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 애왕 4년 11월조, 최대의 수혜자=김부 자신이라는 점도 매력적 인요소의하나,동인이었다고보인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7) 뱚Ⅰ. 경애왕죽음의역학관계 뱚▶다음회에계속 박 순 교 뱚Ⅱ.경애왕죽음과포석정 뱚Ⅲ.견훤과김부의결탁 내용 번호 븮삼국사기븯 번호 븮삼국유사븯 포석정 나-1)① 븮삼국사기븯신라본기 12경애왕4년11월조 나-2)① 븮삼국유사븯권2 기이2김부대왕조 포석정 나-1)②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 견훤조 나-2)② 븮삼국유사븯후백제 견훤조 나-1)③ (생략) 나-2)③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 처용랑망해사 나-1)④ (븮삼국사기븯권48열전8 효녀지은 나-2)④ 븮삼국유사븯권5효선9 貧女養母 목 차 Ⅰ.경애왕죽음의역학관계 Ⅱ.경애왕의죽음과포석정 Ⅲ.견훤과김부의결탁 Ⅳ . 견 휜 의 시 림 진 군 과 포 석 정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