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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6월30일 금요일 7 (제126호) 특집 무릇 신라 왕조는 우리 역사에서 드문 최장수 왕조였다. 일 견, 박혁거세가 나타난 BC 57년에서 김부가 사직을 왕건에게 바치며 자멸한 AD 935년까지, 대략 992년 간 존속한 것처럼 비친다. 허나 김부는 난신적자 견훤이 옹립한 만큼 정통성에 무리가 있어, 경애왕이 죽은 927년이야말로 신라의 명실상부 한 마감이다.세칭 신라를 천년 왕조라 이르기도 하는데,밀레 니엄왕조라칭하는천년왕조에서16년이모자란다. 이러한 신라 왕조에서 55명의 신라왕(견훤에 의해 옹립된 괴뢰 정권의 수장 김부를 포함하면 총 56명)이 있었고, 그 중 박씨 성을 가진 신라왕은 1대 신라왕 박혁거세에서 55대 경애 왕에 이르기까지 총 10명에 달한다.전술한 바와 같이,김부는 정통성이 의심스럽기에 신라왕의 족보에서 생략되어야 한다 고 보면, 신라 역사의 처음과 끝, 소위 알파와 오메가는 박씨 왕으로 요약된다. 명실 공히 신라의 찬연한 역사는 박씨로 시 작하여 박씨로 끝났다고 할 수 있겠다.현재 박씨 일문의 뿌리 는 죄다 55대 신라왕, 경애왕의 동복 형인 경명왕에게서 발단 한다. 까닭에 경애왕은 최후의 신라왕이자, 현재의 박씨 일문 과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적잖은 비중의 인물이라 할 것이다. 한 데 5 5 대 신 라 왕 경 애 왕 의 남 겨 진 기 록 은 한 자 한 자 극 히 아름답지 못하여, 국사는 모조리 팽개치고 포석정에서 여색 과 주흥에 빠져 술을 진탕 퍼마시다가 때마침 서라벌 도성을 침입한 견훤에게 잡혀 죽은,세상에 둘도 없는 파락호,망국의 군주로어김없이묘사되어왔다. 역사에 전하는 경애왕에 대한 주홍글씨가 너무나도 뚜렷한 나머지, 대부분의 족친들도 흉금에 치미는 의심과 억울함은 지녔으나, 정확한 반론을 펼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이를 딱 하게 여긴 박씨 일문 역시 전혀 없지 않았으되, 심지어 어느 박씨 일문은 삼가 필자에게 경애왕의 신원, 보다 정확히는 경 애왕의 진실을 밝혀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바 있었다.하여 필 자는 경애왕에 관한 본인의 연구 자료를 당시 두루 회람하게 하였건만, 유감스러이 일부 자료는 유출, 원래의 목적에 어긋 나게 전용되는 불상사(저작권 침해)가 빚어진 바 있었다. 그 럼에도 필자는 사사로운 억분을 억누른 채로 지금까지 10년 에 가까운 성상에 걸쳐, 경애왕에 관한 행적을 면밀히 조사하 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경애왕의 최후 동선, 전후의 시대 상 황, 왕건과 견훤의 동정, 신라 내부의 상황, 포석정의 숨겨진 의미등에대하여6편의논문을잇달아발표하였다.이에목하 그성과의일부를윤문하여경애왕제하의글로발표함이다. 경애왕은 과연 술꾼인가? 븮삼국사기븯는 927년 한겨울, 신라 55대 경애왕이 포석정에 유행(遊行)하여 주흥(酒興)에 빠졌 고, 때마침 신라에 침입한 견훤에게 체포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븮三國 史記븯권50 열전10 견훤조. 이로써 경애왕 자신의 몸은 죽고, 동생 효렴은 압송되었으며, 군신은 포석정에 함몰되었고 나라는 견훤에게 짓밟혔다. 그 욕됨이 인구에 회자되며 천지에 두루 미쳤다. 당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것은 물론 경애왕의 왕비 를 능욕했으며 군사들을 풀어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강간하 는 등 일대 난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 애왕4년11월조. 기록대로라면, 자만과 독선에 빠져 일족과 군신, 비빈 모두 가괴멸하는단초를제공한장본인=경애왕이었던셈이다. 한데전쟁과견훤에대해누구보다깊이이해했던경애왕이 아니었던가? 경애왕이 수차에 걸쳐 전쟁과 관련한 주문을 한 것이나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 3년 4월조, 븮高麗史븯1卷 世家 1 太祖1 10년(927) 정월조, 견훤을 향한 판단력이 고려의 전설적 무장 유금필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점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 경애왕 2년 11월조, 븮高麗史븯卷92 列傳 卷5 諸臣 유금필 은 무 시 할 수 없는 대목이다. 동시에 그런 섬세한 촉각을 지닌 경애왕이 최 고조 위험의 순간,도처에 도사린 불확실성,생존의 문제를 앞 에 두고서 태연하게 주연을 베풀며 해롱거렸다는 것은 심각 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더군다나 경애왕 치세를 통틀어 경애 왕이 사망한 927년은 왕건과 견훤 사이, 유독 휴전이 없었다. 말하자면927년은살벌한한해였다 924년휴전(븮高麗史븯1卷世家1 太祖1 7년(924) 8월조), 925년 휴전(븮高麗史븯1卷 世家1 太祖1 8년(925) 10 월조),926년휴전(븮高麗史븯1卷世家1太祖19년(924)4월조). 단언컨대,경애왕은포석정에서적침조차깨닫지못할만큼 주흥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전 왕건과 견훤의 전황 을 꿰뚫을 만큼 전쟁에 식견과 관심을 가졌던 경애왕이 견훤 의침공이지닌살벌한속성을몰랐을리없다. 경애왕은이전여러차례에걸쳐견훤을공개적으로비난한 바 있었다. 특히 927년 정월 초사흗날, 경애왕은 왕건과 합동 으로 경북 내륙 일대를 공략했었다.이후 여덟 달에 걸쳐 당대 의 무신(武神) 견훤은 침묵을 지켰다. 견훤의 침묵은 불안한 평화,전쟁이예견된폭풍전야의시간이었다. 견훤에겐, 왕건과 경애왕이 공수동맹으로 엮였다고 인식될 여지가 있었고, 견훤이 약한 경애왕을 거세, 동맹의 한 축을 무너뜨려 힘의 우위를 결정지으려 획책할 위험성 역시 상존 했다. 927년 9월 견훤의 예봉이 전격적으로 남쪽으로 선회,고 울부로 향하는 순간부터 신라, 혹은 경애왕 자신을 향하고 있 음을알았다고여겨진다. 충분한 계획과 섬세하고 정밀한 타격 수순, 목표 하에 견훤 은 경북 내륙의 왕건 진영을 일거에 제압하였다. 치열한 공방 조차 없어 文面(문면)대로라면 견훤은 마치 어미 새가 버린 알을 줍듯, 무풍지대를 종횡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견 훤은 왕건 진영을 계속해서 밀어붙일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고 예봉을 남으로 돌렸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견훤이 남하 하며 화공을 동원한 청야작전을 감행, 기마가 먹을 일대의 목 초와 군량을 깡그리 없앴다는 점이다. 엄밀히 고려 군대의 남 하, 혹은 일대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들 전술을 구사한 셈이었 다.이것은 세력이 보다 약한 경애왕을 제거하려는,이른바 왕 건과 경애왕 둘 중 하나의 거세를 통해 고려와 신라 연합의 붕 괴를 꾀하고 있었음은 쉽사리 파악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경애왕 자신이 이러한 견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 었다는점이다. 군 기 를 점 검 하 고 활 을 쏘 고 말 을 달 려 야 할 시 기 , 侍 從 (시 종)신료와 여자를 데리고 질펀한 연회를 열었다는 것은 누가 봐도 괴이하다. 경애왕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술을 들이킬 혼군이라면 어찌하여 왕건과 견훤의 대립이 매 전환 점을 맞는 순간마다. 督戰(독전)의 편지를 보냈던 것인지. 아 니면 매순간 독전의 편지를 보낼 만큼 전쟁에 대한 깊이, 관 심, 기민함을 유지했던 경애왕이 정작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의 순간에 대책 없는 주정뱅이가 되었던 것인지, 어 느쪽이든풀리지않는딜레마에봉착하게된다. 한데 유독 왕건의 행동이 미심쩍다. 견훤의 반격이 개시된, 초미의 상황에서 신라의 구원 요청이 있기까지 왕건은 선제 적 대응을 취하지 않은 채 시간을 끌었다.다음의 기록은 그것 을 보 여 준 다 . 다-1)九月甄萱攻燒近品城進襲新羅高鬱府逼至郊畿①新羅 王遣連式告急②王謂侍中公萱大相孫幸正朝聯珠等曰,③“新 羅與我同好已久今有急不可不救.”④遣公萱等以兵一萬赴之⑤ 未至⑥萱猝入新羅都城. 븮高麗史븯권1世家1太祖110년(927)9월조 위의 기록에서 왕건은 견훤의 침습 정보를 아예 인지하지 못한듯능청을떨고있다.왕건은세루트를통해견훤의동정 을 파악하고 있었다.첫째,완산주를 비롯한 백제 강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보고망,둘째,경북 내륙에 둔영을 구축한 고려 군의 치보,셋째,왕도의 인후(咽喉)라 할 고울부 능문의 보고 등세갈래를통한상황파악이가능했다. 무엇보다 왕건은 927년 정월, 견훤의 진영을 선제공격하였 다. 해서, 왕건은 견훤의 반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고려에서 후백제로 파견된 세작(細作)의 활동이 없 었을 리 없고,탐마(探馬)가 없었을 리 없다.주적(主敵)견훤 의 일거수일투족은 필시 왕건에게 보고되었고, 왕건은 삼국 의정황을누구보다면밀히꿰뚫었다고여겨진다. 한데 신라 구원 사절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할 때까지 왕 건이 즉각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위 기록에서 왕건은 제 자 리에 앉아 경애왕의 구원 요청을 받고 있는데, 이것부터 왕건 의 심각한 방관이다. 그 결과 신라 경애왕이 구원요청을 하는 것, 그 기록 자체부터 공수 동맹의 심각한 모순이며, 왕건의 적나라한 방관을 보이는 확증인 셈이다. 또 경애왕의 구원 요 청이있은후에조차왕건은즉각친정하지도않았다. 대신뚜렷한군공이나무용조차알려지지않은공훤을주장 (主將)으로삼아출정하게한것이대응이라면대응의전부였 다. 공훤이 거느리고 출병했다던 ‘경병(頸兵) 1(만)萬’의 구 원군’마저 경애왕 죽음의 순간까지 서라벌에 결코 이르지 않 았다. 927년 정월-8월까지 고려와 신라 연합의 전면 대공세로 견 훤의 반격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927년의 엄중한 시기, 왕 건은 어떤 ‘입위왕도’의 사전, 예비 조치가 없었고, 유금필이 나 박수경처럼 견훤의 예봉을 꺾고 왕도를 구할 용력을 갖춘 무장 대신, 활약상이 전무하고 성정 또한 우유부단한 공훤을 주장에 임명했다. 여기서, 마땅히 보내야 할 장수를 보내지 않고, 보내 지말아야할장수를보낸것자체에왕건의깊은속셈이 도사리고있다고 믿어진다. 곧장수와군대를보내되전쟁의적임자가아니며, 돌격전을펼 쳐적의포위망을분쇄할장군을보내지않은왕건의이러한 행동,복심은 마치 조선의 광해군이 장수 강홍립에게 군사를 주면서도 교전하지 말고 때를기다리라고한 대목과도일맥상통하는면이 있다고여겨진다. 고울 부에있으면서927년왕도의울타리역할을포기한 능문이 왕건에게통일 에기여한 공(輔佐之功)을칭찬받아佐丞의관품을하사받은것으로 나타 나는데(旗田巍,〈고려왕조 성립기의 부와 호족〉, 朝鮮中世社會史の硏 究,1972,p.9-11),그 역할과 행적이 오리무중인‘유령군단’의주장공훤 역시 왕건에게 동일하게 左丞의 관품을 하사받았다는 것(高麗國彌智山 菩提寺故敎謚大鏡大師元機之塔碑銘)은, 두 사람 모두 경애왕의 죽음을 방관했던인물들이란점에서우연의일치치곤묘하게느껴진다. 요컨대, 왕건이 당시 전황을 몰랐다는 것은 기만이다. 구원 군을 보냈다는 것 역시 기만이다. 후삼국 쟁패의 가장 위험천 만한 시기,역사의 갈피 속에서 왕건은 당시 기만의 연속을 고 스란히보여주고있는셈이다. 왕건은 자신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평소 경애왕에 대하여 견마지로의 충심을 지녔다고 술회, 역설하고 있다. ‘以 申犬馬之勤. 再擧干戈’(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 및 븮三國遺事븯권2기 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왕건이 견훤에게보낸서한’) .한데927년경애왕이견훤의군사적공격의표적이되었던 그 때, 왕건이 경애왕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도무지 포착할 수 없다. 그토록 사모하고 충심을 맹서했다던 대상, 경애왕이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처했을 때, 왜 왕건은 용기 있는 즉각적 행동을 취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 방관했던 것일까. 어찌하여 왕건은 군사 동맹의 한 축인 경애왕이 공전의 위 기에 처하였음에도 이처럼 방관적 행동을 취한 것일까. 동맹 의 한 축이 무너지면 왕건 자신의 세력도 크게 흔들릴 수 있으 며, 일견 견훤과의 대립에서 치명적인 열세로 돌아설 수 있었 다. 왕건은 왜 이러한 위험한 파국을 감수하며 굳이 무리수를 둔것일까. 우선왕건은견훤과의대전에서승산이없다고파악하고있 었다. 申虎澈, 븮후백제 견훤정권 연구븯, 일조각, 1993. p. 102. p.123에서 도 당시 견훤의 압도적 군세가 언급되고 있다. 견훤의 군세는 왕건을 능가하였고 븮三國遺事븯권2기이2후백제견훤,실제 경애왕 사후 치 러진 동수 전투에서도 왕건은 대패하였다. 백제의 질자 진호 가 죽은 직후에도 왕건은 적극적 군사 대응 대신 수성만을 고 집한전력이있었다.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9년4월 또한 왕건은 시종 신라 병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왕건이 집권초기의청사진으로 계림(신라)정벌을표방하였고(븮高麗史븯권1세가 1태조총서원년3월조), 이후에도신라정벌을염두에두었던점(븮삼국유 사븯 권1기이1천사옥대)은경애왕과 왕건사이 동맹의본질과 한계를여 실히 드러낸다 할 것이다. 특히 김율과 관련한 행간에는 신라 병합을 두 고 심도 있는 문답과 조정이 오가고 있다. 결과 왕건은 신라왕을 존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도 않았다.(박순교, 앞의 논문, 븮인문연구븯78, 2016. p p.81-82). 이런 왕건에게 있어, 신라 내 강한 군주의 등장은 바람직하 지 않았다. 왕건은 내심 신라의 부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약 화를바라고있었다. 신라의힘은왕건이견훤을견제하기위하여동원하고이용 할 수 있는 차원의 정도에서 멈춰야만 했다. 군사의 진퇴에까 지 사사건건 개입하며 주군처럼 행동하는 경애왕의 등장은 껄끄럽기 그지없는 것으로서, 애초 왕건이 원하는 신라왕의 모델이 아니었다. 저돌적인성정의경애왕은왕건에게거북한 존재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후삼국 시대 미묘한 역관계로 인하여 경 애왕은 견훤은 물론 왕건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감이 생겼다고 여겨진 다. 경애왕이 비록 왕건을 향하여 ‘대왕’이라 호칭하면서도 실제로는 고 려군사의진퇴문제,대외관계문제에직접개입하려했다는점에서왕건 의 적잖은 반발을 초래할 여지도 있었다. 그것은 왕건이 경애왕의 충고를 전혀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왕건과 경애왕의 엇박자 는 외교적 수사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제 동맹국 사이에서 오갈 내용으로 믿기힘든파열음이 아닐수없다.(박순교, 앞의논문, 븮인문연구븯78, 2016, pp81-82). 이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경애왕이 견훤의 손에 거 세된다면, 차제에 왕건은 시해의 원죄를 주적 견훤에게 씌워 민심을 일거에 자신에게 돌려 약세를 만회하고 븮三國史記븯 권50 열전10견훤및븮三國遺事븯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왕건이 견 훤에게 보낸 서한’에서 견훤을 경애왕 시해범으로 공박하는 일련의 내용 은이를함의한다.동시에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및븮三國遺事븯기이 2후백제 견훤조에공히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서한’에서 견훤이 왕건을향하여여러번해명을하였음을밝히고있는점에서, 왕건이 여러 차례에 걸쳐 공박하였음을 알 수 있고, 민심을 향한 선전 책동 역시 치열 하게행해졌을개연성역시높다고보인다. 군세를 떨칠 수 있으리란 현실적 판단이 가능했다. 이른바 ‘차도살인’의 전술과 맞아떨 어지는 대목이다. 견훤 역시 자신의 손이 아닌 김부의 손을 빌려 경애 왕을 거세하려 시도했다(조범환,〈신라말 박씨왕의 등장과 그 정치적 성 격〉, 1991, pp.19-20, 이명식,〈신라말 박씨왕대의 전개와 몰락〉, 200 6, pp.22~ 23, 신호철, 븮후백제 견훤 정권 연구븯, pp. 116-122). 견훤 역시 차도살인의 전술을 동원, 활용했던 셈이다. 견훤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경 애왕을제거하고, 이어친견훤의괴뢰정권을수립하는것에목적을두었 고, 다만 시해의원죄에서자유롭고자김부와같은내응세력을활용하였 다고 보인다. 이로 보면 왕건과 견훤은 모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 으면서도 경애왕을 제거, 실익을 챙기고 국면의 전환과 재편을 도모했던 셈이 된다. 실제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은 국왕 시해의 원죄 를 견훤에게 씌워 재지세력의 응원을 이끌었고 븮高麗史븯권2 세 가2太祖213년정월조. 븮동사강목븯5下김부 4년정월21일조. 고창지방의 민심이 경애왕죽음으로 인해변화했음은븮승정원일기븯 영조2년병오(172 6, 옹정46월 5일조), 븮四佳文集븯 卷5, 安東權氏家譜序, 븮신증동국여지승람 븯권24 안동대도호부 인물 김행 편 등에 나타나고 있다 , 마침내 승리하 였다. 더불어난신적자견훤에의해새로이옹립된신라왕은정통 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견훤이 김부를 옹립하였으되, 왕이 아닌 권지국사란 한 대목(나-1) ⑫)의 의미를 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권지는 정식이 아닌임시라는의미로서,난신적자인견훤의손에옹립된만큼태 생적으로 한계를 지닌 존재일 수밖에 없었음을 보이는 일단이다. 신라 의 분열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신라 내 내분이 가속화되면 될 수록 인근 지역의 귀부나 병합은 왕건에게 더욱 손쉬워질 수 있었다 븮三國史記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 4년 9월조, 븮高麗史븯권1태조 13년 2월조의 동해안 110여 성의 집단 귀부는 가장 대표적 예가 될 것이 다. 군사적희생을통하여경애왕을살리는것보다차라리경애 왕을 죽여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왕건에게 더 큰 실익이 있었 다.경애왕의 죽음을 통해 민심과 실익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 는절호의기회가바야흐로왕건의눈앞에이른것이었다. 다만 왕건은 경애왕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측면을 부각시키 고선전할필요가있었다. 그런 포장의 일환에서 1만의 군사를 모우며 경애왕이 죽기 까지시간을끌었다.1분1초가화급한순간에그처럼대규모의 군세,1만의 군사를 한꺼번에 모아서 출정하겠다는 것이나,무 용조차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주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처음부 터 ‘구원(救援)의 골든타임’을 놓치려고 계획하고 작심한 것 이아니라면있을수없는일이었다. 한편 왕건에게 있어서는 송악에서 출병하는 것보다 제 3의 전술을 선택하여 견훤과 대적하게 하거나 최소한 견훤을 사 방에서 욱죄여 움직임을 느리게 할 방편이 없지 않았다. 그것 은 당시 고울부(영천)의 능장, 벽진(성주)의 이총언, 대량성 (大良城)(합천)의 고려 장수 김락을 동원, 이른바 견훤을 향 한삼각공세전술을펼치는방법이었다. 고울부의 향호(鄕戶) (황보)능장은 이미 925년 왕건에게 귀부한 상태였다. 주목할 점은 대개 귀부의 경우 사신을 보내 서신을 전달하는 방식임에도 능장이 왕건의 회답이 떨어지기 도 전에 직접 군사 및 휘하 무리를 이끌고 송악을 방문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능장 일 개인의 귀부라기보다 고울부 유력 세력 전체의 이주에 가깝다는 인상을 지울 길 없다.이후 왕건과 능장의 결속의 정도가 강화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 가 없 다 . 대량성(합천)역시 927년 7월 고려에게 강제 점거된 상태였 다.927년 정월 왕건은 용주 공격을 필두로 경북 북부,충북 북 부를 자신이 공략함과 더불어 남방에 고려의 장군들을 보내 어 양동작전을 개시했다. 4월에는 해군장군 영창(英昌)ㆍ능 식(能式) 등이 강주(康州)(진주)의 하돌산(下突山) 등 4읍 (邑)을 무력 점령했다. 븮高麗史븯세가1태조10년4월8일조 나아가 9 27년 7월에는 강주에서 북상한 고려 장군들,원보(元甫)븡재충 (在忠)븡김락(金樂) 등이 대량성(합천)을 공략, 백제 장군 추 허조(鄒許祖)등 30여 명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븮高麗史븯세 가1 태조10년 7월 10일조. 대량성(합천)은 전술한대로 견훤이 세 차례의 시도 끝에 920년 가까스로 차지했던 전략적 요해지였 다. 뿐만 아니라, 924년 후백제의 왕자 금강 등이 조물성을 공 격할때대량성(합천)의군사를병력으로동원했을만큼실전 능력을 갖춘 곳이었다.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대량성(합천) 은낙수(洛水)이서지역의핵심거점으로서풍부한물산과병 력, 군량이 갖춰져 있었다. 뿐 아니라 924년 후백제 왕자 금강 의 조물성 전투에 동원된 점에서, 3년 뒤인 당시 경북 내륙 일 대의 지리와 전투 경험을 갖춘 병력을 차출, 동원할 병력원 (兵力源)이었다고보인다. 또 일대가 920년 이후 7년 간 후백제군의 지배하에 있었던 점에서, 또 추허조를 비롯한 후백제 장군들을 포로로 한 점에 서,김락 등이야말로 후백제의 전술과 전략,용병의 추이에 대 해서 고려 군 내에서 접근성,이해도가 가장 높았을 것이라 판 단된다. 이런 점 등에서 고려의 원보(元甫)븡재충(在忠)븡김락 (金樂) 등은 전투 경험을 갖춘 노련한 현지인 차출이 가능했 고,달리 합천에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성주,상주로까지 이 어질수도있었다. 더군다나 성주 지역에는 고려의 또 다른 우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벽진(성주)의 이총언이 그러한데 그 역시 왕건에게 귀부하였고, 자신의 아들을 왕건에게 파견할 정도로 충성을 맹서했다.이총언은 왕건에게자신의어린 아들이영(李永)을 보내었다. 븮高麗史븯권92열전5이총언. 한편 旗田巍,〈고려왕조 성립기 의부와호족〉,븮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븯1972, p. 27에선시기, 지점, 왕건 과의관계,행동등제반전거를들어이총언=良文이라상정하고있다. 이에 부응하듯 왕건 역시 성주 지역에 고려의 정조 색상을 파견하고 있었다. 고려인 색상이 이총언의 지역에 있었고, 전투 도중 사망한 점은귀부 지역에대한 고려의간접적통제가있었음을의미한다. 고려의정조색상이 공훤을주장으로 한, 고려구원군의일원이라고보는 견해가있으나1)색상은견훤이 자신의편지에서군공과 관련하여특별히 언급할 만큼 비중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한데 그러한 색상이 공훤 휘하 구원군 명단에서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2)구원군의 일원인 색상이 견훤 에게 사로잡혔다면 고려 구원군이 견훤에게 패전하였다는 것인데, 그렇 다면견훤이 색상외다른구원군을격파한 사실을덧붙여말하지않았을 까닭이 없다. 3) 송악에서서라벌로 온다면그 경로가굳이 벽진(성주)를 거칠필요가없다. 이런점등에서색상을구원군의일원으로 보기는어렵 다. 고울부 역시 능문 휘하의 배근(盃近), 명재(明才), 상술(相 術), 궁식(弓式) 등이 고려 수도 개경에 머물렀다. 이에 비추 어 군략과 전술에 밝은, 색상과 비견되는 다수의 고려인 역시 벽진의경우처럼고울부에파견되었다고보인다. 한데왕건은이처럼주밀한인적네트워크를활용하는전술 을 경애왕의 죽음 직전에는 구사하지 않았다. 왕건이 남방의 김락을 북상시킨 것은 경애왕 사후, 자신의 친정 시기에 즈음 해서였다. 븮高麗史븯권1 세가1 태조 10년 9월조. 븮高麗史븯에서는 927년 9 월의일이라하여경애왕생전의일인것처럼기록되어있으나, 왕건과 견 훤의公山桐藪(大邱北方,達城郡公山面)는경애왕사후일어난 일이므로 김락의북상역시경애왕사후임이 틀림없다 .경애왕 죽음 직전 벽진 역시 단독으로 견훤의 화공에 직면했다. 또 이를 막던 색상조 차 포로가 되어 죽임당했으나븮三國史記븯 권50열전10견훤및븮三國 遺事븯권2 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 공히 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 한’ 및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0년10월, 11월 벽진의 이총언은 고울 부의 공훤처럼 죽지 않았다 븮高麗史븯세가1 태조21년 7월 7일조. 왕 도를 방어하는 결사항전은 애초 없었던 셈이다. 경애왕 죽음 직전, 왕건은 적극적 공세 혹은 ‘여러 세력을 묶는 수세 전술’ 이 아닌, 926년의 예처럼 각개 수성 전술을 구사했다고 믿어 진다. 다시 말해 경애왕 죽음에는 왕건의 방관이 깊이 개재하 고 있 었 다 . 경애왕이죽은이후에조차왕건은즉각출병하는대신조사 (弔使)를 먼저 파견하였고(나-2) D),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 서 직접 거병, 친정하였다 븮三國史記븯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원년 조, 븮고려사븯 세가1태조신성대왕10년 9월조 . 조사 파견븡거병과 친정 의 순서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왕건의 말처럼 존주(尊主)의 진정을 지녔다면 왕건은 거병과 친정븡조제의 순서로 이뤄져 야 옳다. 왜 왕건은 경애왕의 죽음 직전에도, 죽음 직후에도 즉각 거병하지 않았으며, 죽음 이후에조차도 조사를 먼저 파 견한것일까. 왕건이 보낸 조사는 비밀리 파견한 것일 리 없으며,흰 천을 머리와 몸에 두르고 조기(弔旗)를 말에 꼽고 경애왕 시해를 온 천하에 공포, 견훤의 죄악상을 팔방에 퍼뜨리며 내려왔을 것이 틀림없다. 조사의 행로는 송악븡서라벌까지 요소요소를 거치는 만큼, 지방 세력의 동향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인다. 왕건의 조사 파견은 이에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견훤 에 씌우고 민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는 고도의 포석, 선전 전술의일환이었음이확실하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6) 뱚Ⅰ. 경애왕과박씨일문 뱚▶다음회에계속 박 순 교 뱚Ⅱ.경애왕관련기록의의문 뱚Ⅲ.경애왕에대한견훤의숙원(宿怨) 뱚Ⅳ.왕건의방관과주작(做作) 뱚Ⅴ.왕건의속셈 목 차 Ⅰ.경애왕과박씨일문 Ⅱ . 경 애 왕 관 련 기 록 의 의 문 Ⅲ.경애왕에대한견훤의숙원(宿怨) Ⅳ.왕건의방관과주작(做作) Ⅴ.왕건의속셈 Ⅵ.경애왕죽음의역학관계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