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2017년6월30일 금요일 4 (제126호) 관향조 종친회 구산박씨종친회(회장만화)는지난4일오전8시부터종원50 여명이 참가하여집성촌 등주요 유적지를 탐방하는 ‘문화유적 탐방’ 행사를 갖고 뿌리의소중함과 선조님의유훈을 되새기며 친목을 다지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이날 행사는 청년들 과가족단위참여가많았고,2012년부터시작된‘뿌리알기’사업 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행사를 주관한 문화탐 방추진위원회(위원장 정화) 위원들은 벌써부터 차기 행사를 계 획하고있어동행취재를해보았다. 오전 8시 대구를 출발하여 군위군의 석굴암, 부계면 가 호2리 추보재(追報 齋), 군위군 의흥면 송 무 당 ( 松 茂 堂 ) · 삼신당(三愼堂) 兩 世 사적비, 관조 구 산군 묘역, 무검재, 수각(水閣), 의흥 향교,군위군우보면이화리옹산정(雍山亭),군위인각사(麟角 寺)를돌아보는일정은오후 7시행사가끝났다.종친회만화 회 장은 “관심을 갖고 항상성원(聲援)을잊지않은 종원여러분에 게 감사하며, 선조의 유지를 찾아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근 본을 지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종친회 발전은 물론 자기발전으 로 이어지며 지속적인 행사 개최를염원한다”고했다.고령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준비하여 나온 정걸 종친(前교장)은 참석한 종원들을 격려하며 선조를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孝와 연결되 는것으로숭조정신함양을강조했다. 이밖에도 후손으로 의흥면장을 맡고 있는 정찬을 비롯한 청 년들은이번행사를통해많은것을배우게되었다며더많은청 년들이함께하길소망했다. 이번 행사에는 많은 미담사례도 있었다. 탐방단은 우선 집성 촌이면서 관향조의 재사(齋舍) 무검재(懋儉齋)로 인근의 일가 분들을 초청 중식과 다과를 나누면서 정을 나누었다.집성촌 방 문 때에는 열렬한 환영과 격려를 받았으며 선조의 좌우명을 되 새기며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짐하는 자리가 된 가운데 정화 위원장은 정성껏 준비한 팜플렛 배포와 자세한 소개로 참가자 들의 이해를 도왔으며,이 행사는 내년에도 꾸준히 이어질 것이 라고말했다. 구산 박씨(龜山朴氏)의 관향조 천(初諱는 쭈, 改諱는 碩輔) 은 밀성대군(密城大君)언침(彦枕)의 15세손이며 대제학(大提 學)광후(光厚)의둘째아들이다. 고려우왕(高麗禑王) 때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진 형 위( 쭈) 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우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구 산군(龜山君, 태조5 1396)에 봉해졌으며, 의흥현(義興縣 : 지금 의 군 의 군 의 흥 면 )을 중 심 으 로 하 는 동 북 4 개 면 을 식 읍 (食 邑 ) 으로하사(下賜)받았다고한다. 벼슬은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 의정에 이르러 후손들은 밀양에서 분관(分貫)하여 관향(貫鄕) 을구산(龜山)으로하여세계(世系)를이어왔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는 구산(龜山)은 군위군(軍威郡)의 옛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新羅 景德王) 때 적라현(赤羅縣)으로 고쳐 숭선군(崇善郡 : 지금의 선산군)에 속했다가1914년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의흥(義興)으로 병 합되었다.묘소는 의흥면 수북리 무검동에 있으며, 구산군 실기 (實記)가 전해진다. 구산군 실기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된 단행본 사본으로 저자는 박석보 발행연도는 미상으로관련내용은다음과같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관인(官人) 박석보(朴碩輔)에 대한 실 기(實紀)이다. 박석보의 본관은 밀양이다. 그의 생몰년은 불확 실하며 1396년(태조 5년) 왜구를 물리치는 한편 대마도를 정벌 한공으로구산군(龜山君)에 봉해졌다. 윤규범 및 정종노가 쓴 실기의 서문(1819년)과 발문(跋文)에 의하면 1812년 의흥에서 성(姓)이 박씨(朴氏)인 한 향리가 자신 의 집안에서 박석보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자, 그에 대한 자료가 븮조야기문(朝野記聞)븯이나 븮구성읍지(龜城邑誌)븯 또는 [가승 (家乘)]에약간씩남아있는것을보완할수있는기회로삼아박 석보의 후손인 박경문(朴慶文)과 함께 발견된 교지(敎旨)와 가 승(家乘) 자료들을 정리하고 또 여러 사람에게 발문 및 서문 등 을받아1819년(순조19년)실기한권을완성하였다고한다. 실기의순서와내용은다음과같다. 먼저 븮조야기문븯에서 박석보에 대한 사실(史實)을 초록(抄 錄)하였다. 이어서 이상진(李尙眞)이 찬(撰: 1771년, 영조 47 년)한 서 박씨가승후(書 朴氏家承後)로 그가 의흥군(義興郡) 에부임하였는데,박석보의후손인박경후(朴慶後)가가승일권 (家承一卷)을 보여주어 박석보의 사적(史蹟)이 훌륭하였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수태(李秀泰: 1727년)가 찬(撰) 한 박석보의 유사(遺事)와 신체인(申體仁: 1814년)과 한치응 (韓致應)등이찬(撰)한기표(墓表)가있다. 다음 정홍경(鄭鴻慶)이 쓴 고명록후서(誥命錄後敍: 1812년, 순조 12년)는 박석보의 후손 박두명(朴斗明)이 박석보의 교지 (敎旨)가 지금의 제도와 달라 그 진위 여부가 의심된다고 물어 오자 제도의 신구식(新舊式)이 다르니 이를 감안해야 할 것이 라고답한내용이다. 이후 경현사봉안문 이수태 찬, 세덕사이안시신고문, 장향축 신체인 찬, 구음서원승호고유문 김토굉 찬, 구음서원상량문 정 종노 찬, 세덕사강당상량문이건시 신체인 찬, 부(附) 경현사상 량문 이수태 찬이 있고 마지막으로 윤규범가 쓴 실기서(1819 년)와 정종노가 쓴 실기 발문(1816년)이 있다.』 관향조 천의 차남 인완(仁琓)은 주부(主簿)를 역임하였으며 도산정파(道山亭派), 6세에 이르러 번성하여 조선조에 군수를 지낸 유창(惟昌)은 행정파(杏亭派),조산대부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유녕(惟寧)은 이정파(梨亭派파),현감을 지낸 웅언(雄彦) 은 옥천파(沃川派), 호군을 지낸 수창(壽昌)은 신녕파(新寧 派), 장사령으로 봉사를 역임한 하령(遐齡)은 와동파(瓦洞派), 어모장군에 이른 형지(亨枝)는 두동파(杜洞派), 의장(義長)은 청송파(靑松派),참의를 역임한 장연(長淵)은 경주파(慶州派), 이정공 유녕의 장남 승손(承孫)은 통덕랑에 올랐으며 차남 흥 손(興孫)은 효력부위(效力副尉)에 이르렀으며 성동파(星洞 派)로,현손대준(大儁)죽정파(竹亭派)로분파되었다. 구산박씨는 구산군의 묘소와 재사 무검재가 있는 군위군 의 흥면 수북리를중심으로구산군의차남인완(仁琬)의 도산정파 (道山亭派) 후손들은 의흥군 읍내리, 5세손 유창(惟昌)의 행정 파(杏亭派) 후손들은 의흥면 수북리, 5세손 유녕(惟寧)의 이정 파(梨亭派파) 후손들은 우보면 이화리, 6세손 흥손(興孫)의 성 동파(星洞派)후손들은의흥면수북리와부계면가호리에세거 하고 그 밖에도 우보면 이화2, 3리, 미성리와 군위읍 서부1리에 산재해있다. 군위군에는 구산박씨 선조의 유적이 많이 산재해 있다. 구산 박씨의 대표 재사(齋舍) 무검재(懋儉齋)를 비롯하여 성동파의 추보재(부계면 가호리), 운천정(이화리), 자효재(이화리), 수 각(수북) 행정파의 영모재(수북), 쌍무헌(수북), 노행정(수 북), 근암재(수북), 이정·죽정파의 웅재 유허비(이화리), 옹산 정(이화리),첨모재(이화리),도산정파의 도산정(의흥 읍내리) 등이 있다. 이번 탐방에는 무검재와 수각, 옹산정, 옹재 유허비 를돌아보았다. 구산박씨의 대표재실 이다. 1781년 창건하여 1 954년 중건했으며, 그 이 후수차례에걸쳐수리하 여 지금에 이른다. 대지 는 1100평 정재(正齋)25 평 동재(東齋) 15평, 서재(西齋) 15평으로 정재는 정면 5칸 측 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주변에 ‘구산군박선생무검단비’가 있다. 추보재는 구산군(龜山君)의 11세손 휘 금화(琴華)공께서 동 림(桐林)마을 입향 이후 일가를 이루면서 덕을 쌓아 인재를 양 성하고 훈육하여 문풍(文風)이 일어나 마침내 입향조로 부터 4 대에 걸쳐 군자감정(軍資監正),공조참의(工曹參議),한성부좌 윤(漢城府左尹), 영의정(領議政)의 관직이 증직되어 인근에서 그 공적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손들이 조상의 유덕을 널리 후대에 알리고자 일문중이 분연히 일어나 조상이 기거하 시던 곳에 중시조(中始祖)의 15세손 휘(諱)두동(斗東,호 성산 (星山))의재사(齋舍)를건립하고자마음을모았다. 수년간에 걸친 피나는 열정과 노력 끝에 1946년 현재의 위치에 대지150평,건평50여평의재사를마련하는역사를이루었다. 이는 자손들의 본보기가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의효도를더욱돈독히하고조상의유덕을길이빛나게한 쾌거라고아니할수없다.초창기의재사는볏짚으로된지붕이라 쉬이 건물이 상할까 문중에서 염려하여 다시 기와로 교체하기로 하고3년후인1949년에기와로교체하였다.(1차정비) 문중에서 재사를 쓸고 닦고 다듬고 하여 관리에 최선을 다하 였으나 지은 지 30여 년이 경과함에 따라 마루, 기둥의 색이 퇴 색하고 기와는 낡아 떨어지고 누수위험이 있어 1970년도에 기 와를교체하였다.(2차정비) 2차 정비 후 34년이 흘러 기와는 낡아 떨어진 곳이 여러 군데 있고 처마부근 누수, 남측 툇마루는 낡았고, 벽체는 떨어지고, 문틀 뒤틀림, 문살 일부 망실, 대문간은 서측으로 많이 기우러 져 있어 전 문중원의 결의 및 참여로 2004년에서 2005년까지 2 년간에걸쳐3차정비하였다. ■추보재기(追報齋記)해설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도(道)이고 정성을 생각하는 것을 사람의 도이다. 위대하구려! 공자나 맹자의 말씀이여! 대개 정성을 생각하는 도가 하나가 아니지만 오직효도만이 우선이 되고효도를생각함이 하나가아니지만 오 직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함이 중요 하나니 실(實)은 상하(上下) 를 통하 거나 고금(古 今)을 관 통하 더라도 가히 바꿀 수 없는 것이 다. 지금 우 리 일족(一族)인 종원(鍾遠) 군(君)이 선조님의 어진 덕을 되돌아 생각하여 제종(諸宗)분들과 더불어재물을모아재실을당일에은둔하고거처하시던 곳에건립하여그 문간위의현판을『추보재(追報齋)』라하였으니대개정 성을 생각하는 도인 것이다. 인하여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종장(宗丈)님 만한 분이 없습니 다』라고하였으니이것은대개문장(文章)으로서가아니고일족의정의로 서였으니어떻게묵묵하게만 있을뿐이겠느냐? 내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하기를 『군위읍의 남쪽 팔공산의 아래에 동림촌이 있는데 마을에 덕을 빛내신처사인휘(諱) 두동(斗東)이 계셨으니벼슬은숭정대부(崇政大夫, 종 1품의 품계명)요, 호(號)는 성산(星山)인데 그 가운데서 은거하며 의(義)를 행하셨으니그 사적이나행적에나타난 것은부모님을효도로 섬기고형제 를처우함은우애로웠으며자손을교훈함은도가있었고종족과 더불어화 목으로서 하였으며 붕우(朋友)를 대우하기는 의로서 하고 악을 숨기고 선 을 드러나게 함으로서 마음을 삼고 곤궁한 자와 급한 사람을 구제함은 인 (仁)으로써 하니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어질거나 어질지 아니함은 막 론하고모두가그에게환심을얻었던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지나치면 마음은 공허하고 현묘(玄 妙)한 지역에 놀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미치지 못하게 되면 시끄럽고 화려 한 명성이나이익의끝에버리게되나니그 지혜로움도가희 민망스럽다』 고 하였다. 공(公)께서 스스로 감추기를 힘쓰며 일찍이 어질고 지혜로움에 자처하지 않았으며 일상의 일들을 법도나 규칙의 가운데서 벗어나지 아니 하고 언동(言動)으로 체험하며 밥을 한 그릇 먹거나 휴식하는 즈음에도 대 개하루도방심하거나태만 하는곳이 없었으니아!아름답구나. 송풍이나나월(蘿月)에는지금도비슷한 기상이 머물러있고나무밑에서 먹거나개울에서마셔도아직도오히려이것을아련하게감모(感慕)한다면 이 추보재(追報齋)를지은것이 그 정성을생각하고먼조상을추모하는마 음이 깊고도간절한 것이 아닐소냐? 태사공께서말하기를『후인은진실로 공(公)이 아니다. 백세(百世)에현 인(賢人)이 없구나』라고 하셨으니 나의 이 엷은 덕과 시들은 덕으로 어떻 게감히감당하리오? 고인이 말하기를『두텁게쌓으면크게발휘하고많이 쌓으면단단하게 이룬다』고 하였으니 공이 돌아가신 뒤로 세월과 대수가 많았으나 재실 (齋室)을비로소이루었다면그 두텁고또한 많음을가히알 것이다. 『지금부터후로는자손들의효도함이 더욱 돈독하여게을리하지아니 한다면재실이더욱새로워질것이니가히단단하고또한크다고하지않 겠느냐?』하고는 드디어 기문(記文)을 삼았으며 공의 자손들이 힘쓰게 하 였다. 정해년(丁亥, 1947) 맹춘(孟春) 일월(一月) 상한(上澣)에 족종후손(族 從後孫)오식(午植)은삼가지음 구산군의 8세손 휘 전 (諱詮,호 明溪)은 명종7 년(1552년) 사마시(司馬 試)에 등과(登科)한 생 원(生員)으로 은거임천 (隱居林泉)하여 정자(亭 子 )를 건 립 하 고 후 진 강 학(後進講學)의 장소였 다.임진왜란(1592년,159 8 년 )때 에 소 실 된 후 현 건물은 1811년에 중건 (重建)되고 1925년에 중 수(重修)하였다. 경내(境內)에는 명계공께 향사(享祀)드리는 성동단(星洞壇: 1868년 축단(築壇))과 상현사(尙賢祠)가 있다. 상현사는 관조 (貫祖)이신 구산군(龜山君)과 낙빈 이언공(洛濱 李堰公),무계 박민수공(舞溪 朴敏樹公), 명계공(明溪公) 및 유촌 박종남공 (柳村 朴從男公) 등 5위(五位)를 추모(追慕)하여 제향(祭享) 하는 곳으로 수각중건(水閣重建)때인 1811년에 건립하였다.수 각에는 후손들이 지켜야 할 좌우명이 편액으로 걸려 있어 인용 해본다.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 로서 하고, 어른섬기기를 공 경으로서 하며, 몸을 행하기 를바름으로서하고, 남을대 하기를 용서로서 하며, 일족 ( 一族)을 대하 기를 화목 으로 서하며, 벗과 더불기를믿음 으로서 하고, 기거동작을 때 에맞게하며,말씀은반드시삼감으로서한다. 위 내용은 선조(先祖, 명계공)께서 스스로를 경계하시던 말씀이다. 병화 (兵火)로 인해끊어지고불타버려이것만이 홀로 남아있는것은, 세속의도 리를쫓아오르고내리는것이 아니기때문이 아니겠느냐?쟁그랑거리는것 은 옛날의 편경(偏傾)을 울림이요, 밝게 빛나는 것은 순금(純金)이 쌓인 것 이다. 비록이것이 짧은글이고몇자여서, 전체솥가운데에있는얇게저민 고기이거나태산(泰山) 속의한 깃털에지나지않을뿐이라도, 또한 넓음을 돌이켜 간략함으로 나아가고 꽃을 물리치고 열매를 높일 수 있다면, 오늘 중건(重建)하는날에다시걸수있으니어찌창위의벽에걸어보이는덕이 귀한 것이겠는가? 아! 여러 종친(宗親)은 어찌하여 제각기 힘쓰지 않은 가?11세손오식(午植)이 삼가쓰다.』 옹산정은 1920년에 중 건 (重 建 ) 한 웅 재 휘 치 림 (致霖)의 재사(齋舍)로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이다. 참고로 옹재 유허비 번역 문을곁들여본다. 『중종(中宗: 조선 11대 왕) 17년(1522년)에 의흥(義興)의 명성리(明星里)에서 태어나시고 선조(宣 祖:14대왕)30년(1596년)때향년75세로 돌아가셔성평리(城坪里,성뜰)금 산(錦山)의사좌(巳坐: 24방위의 하나로 북서와 북북서 사이 방향)에묻히 셨다. 휘(諱: 돌아간 높은 어른의 이름)는 치림(致霖, 52世), 자(字)는 뇌여 (賚汝),호(號)는옹재(雍齋)이시다. -중간생략- 옹재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셨고 일찍부터 학문의 길에 들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서적에 몰두 하셨는데 특히 정자와 주자의 글을 좋아하셨다. 물욕(物慾)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종일토록 책상을 마주하고서 벽에 효우충신(孝友忠信) 넉자를 걸어 두고항상보시면서마음에새기셨다. 조상에게제사지내는것은그 제수의많고적음이 아니고정성이 부족하 면흠향(歆饗: 신명(神明)이 제물을받음)하지않는다고하시며상례(喪禮) 와 제례(祭禮)를 한 결 같이 주자가례에 따라 조상을 받드는데 정성과 공경 을극진히하셨으며특히예에대하여분석함이 정밀하신만큼예학에조예 가깊어한 지방예절의표준이 되었다. 임신년(1572년)에 학행이 알려져 능참봉(陵參奉: 능을지키며 관련된일 을맡아보던종9품 벼슬)에제수(除授:천거의절차를밟지않고, 임금이 직 접벼슬을시킴)되었으나나아가지않으시고옹산밑에거처를정하여신회 당(申悔堂)고두곡(高杜谷)과 더불어도의(道義:사람으로서마땅히행해야 할도덕과 의리)의교제를하셨다. 임진왜란때임금이 피난을하게되자호종(扈從:임금이 탄수레를모시 고따라감)하고자하였으나노쇠하여힘이 없는지라아들을의병의진영에 보내서죽음을각오로 나라의은혜를갚으라고훈계하셨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유산이 모두 병화에 타버렸으니 만년에 지극히 마 음아파하셨다. 아! 아! 공이 훌륭한 집안의 후예로서 타고난 자질이 이미 훌륭하고 속 에 온축한 학문 또한 풍부하여 그에 성취한 것이 남과 다르게 뚜렷했으나 오직 시골생활을 고수하여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고 증거 할 만 한 문헌도 없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 하니마땅히그 후손에게보답이 있을것이다. 후손인 원식(元植)이 공의 유지(遺址: 옛터)에 아무런 표시가 없을 수 없 다하여나에게글을부탁하는데내가노쇠하고글도잘하지못하기때문에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함이 나의 사양보다 지극한지라 드디어 간략하 게 앞 뒤 사실을 서술 하 고 이 어서 새김글을 쓴다. 아! 아! 빛나는 옹재는 이름난 시대의 훌륭한 선비이다. 젊어서 공부할 땐자나깨나정주학(程朱學:중국송나라때의정호(程顥)·정이(程 視)와주 희(朱熹) 등이 발전시킨 유학)와 학문이었고 나라의 부름을 여러 번 사양하 고 은거 생활을 굳게 지키며 뜻을 같이하는 이와 서로 수양하고 서로 이끌 어 주었네. 우뚝한 저 옹산은 어진기운이 넉넉하구나. 돌에 새겨 드러내니 여기가선생의남기신터로다.승지(承旨)김홍락(金鴻洛)지음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구산박씨종친회선조유적탐방행사 가져 무검재앞에서다음행사를기약하며종중발전을위해노력할것을다짐하고있다. 뿌리알기사업일환,2012년부터경주숭덕전부터순례시작2017년종중집성 촌탐방 송무당·삼신당 양세 사적비 앞에서 선조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추원 보본하는 생활을 다짐하며 비석을 돌아보고 있다. 두 분은 고결한 인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지역의 인재양성에 앞서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 천한 거유(巨儒)로 칭송받고있다. 박만화회장 박정화위원장 박종명총무가참가한 청년들을소개하고있다. 순례단이 구산군묘소를참배하고있다. 뱚■구산박씨의유래 뱚■구산박씨분파와군위군 의집성촌 추보재현황과 입향내역을설명하고있는박종기전교(○안) 뱚■탐방유적지 뱚무검재(懋儉齋) 뱚추보재(追報齋) 추보재를 찾아 기념 촬영을 하 고 있다. 뱚수각(水閣) 경북 군위군의흥면수북2리1105, 대지8백 평,건평50평. 좌우명-수각 안에 걸려있어 후손들의 지침 이 되고있다. 뱚옹산정과유허비 경북 군위군우보면이화2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