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7년6월30일 금요일 12 (제126호) 기획 화랑정신의발상지로잘알려진청도에면면히이어져오는호국충절의맥을짚어보면고려말불사이군의충 절을지킨두문동8절(節)로꼽 히는송은(松隱)박익(朴翊)선생의후예,청도밀성박씨소고공파문중이있다.청도에입향한소고공(嘯皐公 )박건(朴乾)선생이래처사적삶 속에서지역백성들을위해애쓴소요당(逍遙堂)하담(河談),성와(城窩)하청(河淸),병재(甁齋)하징(河澄)삼형 제,그리고임진왜란 대 집 안 의 존멸위기에도몸을아끼지않은14의사에게로,충절의마음은뜨겁게이어져본보에서는2015년학국학진흥원 한국학학술대회‘조선선비의 형성과충절’에서박홍갑박사(국사편찬위원회)의『청도밀성박씨소고공파가문의내력과활동』원고를인용 다루어보고자한다. ▶서론 조선 세종조 이래 경상도 청도에서 살아왔던 밀성박씨 소고공 파는영남에서도비교적큰문중을이루고있다.세칭거주지에따 라수야박가(이서면수야)혹은섶마리박가(금천면신지)로불리 는 동족마을을 잘 유지해 오고 있는데,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당시 수야동에는 밀성박씨가 120호로 안동 구담마을의 순천김씨 문중을제외하고는가장큰규모로자랑하고있다.소고공박건선 생이 처음 정착지로 삼았던 마을이 곧 수야인데,삼성산의 지봉이 승천하는 용처럼 힘 있게 융기한 덕영릉(德嶺稜)이 뻗어 있고,한 편으로는 태봉산의 두 봉우리가 나란히 달리면서 힘을 자랑하듯 뻗은 골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좌청룡 우백호의 다툴 듯한 융 기가 자연적인 지기가 되어 마을을 보전해 주는 듯한 취락의 요건 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1리인 수야에는 1439년에 밀성인 소고공 박건 공이 밀양에서 이주하여 이 마을에 정주하였고,40여년 후인 1479년에는 밀양인 박하담 공이 정착하여 터를 다지면서 동명을 정하고자 지형을 살펴보니 냇물이 야(也)자로 흐르므로 수야(水 也)라고부르고박공이손수은행나무를심어행정(杏亭)이라하 였다.이렇듯 밀성박씨 소고공파 후예들은 청도에 뿌리를 내린 이 래 청 도 김 씨 를 비 롯 한 토 성 세 력 이 나 동 시 대 에 이 주 해 온 다 른 문 중(김해김씨, 고성이씨 등)들과 때로는 협력관계 때로는 대립관 계를 보이면서 지역사회의 으뜸가는 문중으로 성장해 갔다. 특히 영남사림 세력이 성장해 가던 시기에 소고공의 손자 3형제(학담, 하청, 하징)가 두드러진 행적을 남겨 각기 파조로 받들어지고 있 는데, 이들 후예들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서도 위선사업을 위한 다양한 종족활동을 해왔고,그 결과물인 각종 유형 무형의 문화재 들이학계나언론에서까지꾸준하게주목을받아왔다. ▶소고공박건선생의가계 고려말기 밀양의 박씨들은 박홍신(영동정공파) 계열과 은산· 행산 계열이 그 지역을 대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소고공 박건의 세계는 은산부원군 박영균으로 연결된다.밀성박씨 여러 갈래중 에서 은산파 시조였던 영균(永均, 태사공 언부의 7세)은 판도판 서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익(翊) 또한 고려 말에 출사하여 예 조판서까지 역임했으나 이성계 섬기기를 거부하면서 고향 땅 송 계(松溪)계곡에은거하여두문동72현으로추앙받는인물이다. 박익의 아들 4형제(융, 소, 조, 총)는 모두 새 왕조에 출사를 하였다. 송은선생은 소고공의 조부로 이성계가 5차례 불러 좌상까지 제수하려 하였으나 끝까지 출사하지 않은 충절의 보여 정종 즉 위년에 서거(逝去)하자 변계량이 시장(諡狀)을 올려 충숙(忠 肅)으로 시호가 내려졌고, 2000년 여름에 태풍으로 밀양 고법리 의 묘소에서 벽화가 발견되면서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발견 된 벽화는 역사뿐만 아니라 민속생화사적인 면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여서 각 일간지나 방송에서 대대적인 고개가 있었음은 물론 학술적으로 큰 조명을 받기도 해 사적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박익의 아들 4형제 중 맏이는 융(融)으로 문과를 거쳐 이조정 랑과 군수를 역임했고, 둘째 소(昭)는 생원시를 거쳐 현감, 셋째 조(調)는 진사시를 거쳐 예조정랑, 넷째 총(聰)은 호조정랑을 역임했다. 후일 이들 4형제의 호를 따 우당(憂堂), 인당(忍堂), 아당(啞堂),졸당(拙堂)파(派)각기분기(分岐)되었다. 소고공의 아버지 우당공(휘 융)은 태종 8년(1408) 문과에 급제 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활동할 때에는 내관 황도(黃稻) 등이 황해 도 지역에 사냥을 다니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고, 그로부터 한 달후취각(吹角)때간관들과함께하지않았다는이유로동료들과 함께 파직 당했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형조·이조 좌랑을 거쳐 전 사판관, 금산군수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정랑으로 옮겨 강원도 경 차관,경상도도사등을겸직으로수행하였고,세종6년전농소윤을 제수받아서도경상도도사를겸직한상태에서경력으로승진하였 다가세종7년성균사예,곧이어함안군수등을역임하였다. 우당공의강직한성품은사간원정언으로재직시언론활동에서 잘 드러난다.내관 황도가 황해도 장연의 강무장에서 개 말을 조습 한다는 핑계로 농민들의 원성을 일게 하자 이를 중지시키도록 태 종에게 요구하였다. 강무는 군사목적상 필요한 것이란 태종 나음 대로의 방침으로 해명하자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요구하여 강무 장을 폐쇄하도록 하는 간관의 풍도를 잃지 않았다. 강원도 경차관 시절에는 개국공신들이 수렵장을 빙자하여 농토를 침식하는 폐단 을 극간하여 바로 잡기도 하였다.그후 경상도 도사로 재임하는 동 안권근의입학도설(入學圖說)간행하여반질하여교육진흥에힘 을 쏟는 한편 각 군의 향교를 중수하고 제례제법(祭禮祭法)을 고 증하여재정비하는등유교이념을정착시키는데진력을다했다. 우당공이 청도향교를 크게 중흥시킨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가 함안 임소에서 생을 마감하자 시민들이 부모상을 당한 것 처럼 슬퍼하고 파시(罷市)하였다 한 것에서도 수령으로서의 자 질에대한단면을잘보여준다하겠다. 우당공의배위는아산장씨이며2남2녀를두었다.그중에서소고공 은 차남으로 장녀는 순흥안씨 안돈후(安敦厚)에게 시집가 장(璋)과 당( 땋 )을 낳았는데 장은 부사,당은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 다.2녀는김유장에게시집가치원,치형,치리,치성을낳았는데이들 5부자는 모두 절도사를 역임라여 세칭 5절도사라 불렀다. 김유장은 익안대군(태조이성계의셋째이방의)의사위였던첨봉제김한의아 들이었고,치원과치형은세조즉위시원종공신에녹공되었다. ▶소고공박건의청도입향과정착과정 탁영 김일손이 청도 교수직으로 있을 때 향교를 중수하면서 남 긴「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에서“본군의 학교는 다섯 번이 나 옮겼지만 자리를 정하지 못한 채 사찰을 빌려 사용하다가 국초 에 와서 지금의 자리에 세울 수 있었는데, 경상도 도사 박융 선생 이 큰 힘을 썼다”라고 한 바가 있다.이처럼 박융이 청도와 인연을 맺 었 던 것 이 곧 그 의 차 자 였 던 소 고 공 박 건 이 청 도 로 입 향 한 계 기 가 아 닌 가 한 다 . 당 시 청 도 에 서 큰 세 력 을 유 지 한 이 가 병 조 판 서 김철성(金哲誠)이었는데, 소고공 박건이 그의 딸과 혼인을 계기 로청도밀양박씨소고공파를여는입향조가되었기때문이다. 조선전기 대대수의 입향 과정을 분석해 보면 처가동네로 이주 한 사례가 많은데, 당시에는 재산상속 자체가 아들과 딸에게 고 루 나누어 주는 균분상속 이었다. 따라서 재산을 상속 받은 처향 (妻鄕) 혹은 외가향(外家鄕)으로 이주하 는 것이 보편화된 사회 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박건의 경우에도 밀양 삽포에서처향이었던청도수야로이주하였다. 김철성은 17세기 중엽에 편찬된 청도의 사찬 읍지『오산지』 「文武名人」조에 첫 번째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청도 상북면 이동에 살았으며, 그의 묘 역시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단인 『문과 방목』에는 그 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다. 아울러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 하면 세종 26년(1444)에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것으로 확인될 뿐,그밖의행적에대해서는기록에전혀남아있지않다. 『光山金氏判軍器監事公派譜』에 의하면 자는李明이고사헌부 감찰을 역임했으며, 묘는 충남 서천 행제동(杏堤洞) 子坐에 있 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산지』 기록에 의하면 그의 묘가 청도에 소재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 밀성박씨 문중에서 지금껏 그 묘를 관리하면서 향사를 받들고 있다. 따라서 서천에 있는 그 의 묘 는 허 묘 (墟 墓 ) 일 가 능 성 이 크 다 . 고려초기부터명문의기틀을다지기시작한광산김씨는시조의 11세손 位와 珠永을 이은 光世와 光存대에 와서 양대 산맥으로 분 기된다. 그 중에서 광존 계를 살펴보면 그의 현손 풀이 대제학. 진 의 증 손 若采 는 문 과 에 급 제 후 대 사 헌 을 거 쳐 충 청 도 관 찰 사 를 지 냈고 그의 아우 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표 문이 공손치 못하다하여 황제 노여움으로 유배되어 돌아오지 못 하였다.김철성 조부인 若時는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진현관직 제학(進賢館直提學)에 이르렀다가 나라가 망하자 경기도 廣州 (현 성남시 금광동) 산골에 은거하였는데, 이들 광산김씨 일파가 청도에 정착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김철성은 1남 7녀를 두었는데, 박건은 그 중에서 제6녀와 혼인하였다. 이렇듯 8 남매의 균분상속이었다면, 박건에게 상속된 재산 역시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보여진다.현재청도수야4리에해당하는지대(池臺) 일원을김철성에게상속받았던것으로알려지고있다. 소고공 박건은 무과를 통해 입사 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禦侮 將軍(정3품)으로 훈련원 봉사와 용양위 부사직(龍 웹衛 副 司 直 , 종5품)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 초기 군사제도의 근간을 살펴보 면, 세종이 기존의 10司에서 12사로 개편하였다가 문종이 즉위 하자 이를 다시 5사 체제로 만들었고, 그 뒤 세조 3년(1457)에 5 사를 다시 5衛로 개편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 개편된 5위중에 하 나가 용양위(龍 웹衛)였으니, 박건이 무과 급제 이후 훈련원 봉 사를 거쳐 용양위 부사직을 역임했다는 족보의 설명은 어느 정 도 신 빙 성 을 확 보 하 고 있 다 고 볼 수 있 다 . 훈 련 원 역 시 조 선 초 기 에 무과출신들이 권지(權知)로 배속되는 기구였고,따라서 박건 이훈련원봉사를역임했다는사실또한믿을수있는내용이다. 이렇듯 박건은 세조 초기에 설립된 용양위 소속 장군으로 있다 가그후두차례정도귀양간것으로보인다.세조11년(1465)왕세 자가사냥을하고돌아올때박건일행이말을달려길을끊었다는 것인데이행위가의도적이었는지아니면실수였는지에대한것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이로 인해 박건은 이신행과 함께 장1백 대에 고신을 거두어 외방에 유배하는 형을 받아 귀양 가게 되었다.현재 남아있는 박건의 시 몇 편 은 모 두적거지(謫居地)에서 남겼던 것 들이나, 더 이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실록 기록 과현존하는문중기록이어느정도상관성을가진다는점이다. 청도 밀양박씨 입향조 박건은 아들 박승원을 두었는데, 그 역 시 무과를 통해 입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충순위 부 사직을 역임하였고, 사후 忠順公 시호가 내려졌다. 박승원은 밀 양에서 이주해 온 아버지 박건의 기반과 또 외가인 판서공 김철 성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았고,또 진주하씨 경절공 하숙 부 딸과의 혼인을 계기로 경제적 배경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 다. 당시 청도 수야 지역의 광활한 농장을 소유했던 경절공 하숙 부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이 사위인 박승원에게 거 의상속되었던것으로보인다. 진주하씨는그계통이뚜렷하지않은3개의계파로나누어진다.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하진(河珍) 을 시조로 하는 사직공파(司直公派),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는 단계공파(丹溪公派)가 그것이다. 사직공파의 하연(河演)과 하륜 (河崙)은 같은 시대에 정승을 지냈건만,서로의 계보를 상고할 수 가없다.하륜과계보를같이하는하숙부의경우그조부가河敬復 이다.하경복은 조선 초기 병마도절제사로 15년 동안 북경 수비에 큰 공 을 세 운 인 물 로 , 영 의 정 을 지 낸 하 륜 과 는 7 촌 간 이 된 다 . 양 정 공 하 경 복 , 장 강 공 하 한 , 경 절 공 하 숙 부 는 3 대 에 걸 쳐 내 리 무과를 급제한 무반 가문이었다. 경절공이 청도에 정착했던 연유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단서를 잡을 수가 없다. 진주와 하동 지역에 진양하씨 집성촌은 많고, 그 중에서 대곡면 단목리, 수곡 면 사곡리, 옥종면 안계와 종화리 등이 대표적인데, 양정공 후손 은종화리를중심으로세거하고있다. 박승원의 장인이 되는 하숙부는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청간(請簡)함이 칭송되었고, 그의 조부 하경복과 함 께 『신증동국여지승람』진주 인물조에도 나란히 올랐을 정도다. 세조 12년(1466)에 이미 통정대부에 올라 당상관이 되었고, 이 듬해에는 명에서 여진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자 대장 강순 휘하의 비장으로 어유소·남이와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운 바가 있다. 그 후 부총관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절도 사로 있던 연산군 7년(1501)에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지위로 봐서는 적지 않은 하숙부 재산이 사위였던 박승원에게 상속되었는데, 그것은 수야 마을 일대의 전답과 노비였다. 박승원의 장자 박하담의 문집『消遙堂逸稿』에 의하면, 지대(池臺)는 중외조(重外祖) 判書金公(金哲誠)에게, 奴婢는 外大父 敬節 河公(河叔溥)에게서 물려받았다 한다.이리 하여박승원은아들삼형제이름을河淡·河淸·河澄으로지었는 데,이는외가인진주하씨를잊지말라는뜻을담은것이었다. ▶사림세력성장과소고공파후예들 소요당 박하담,성와 박하청,병재 박하징 등 소고공 손자인 이 들 3형제 대에 이르면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의 위치에 우뚝 서게 되었지만, 사화기를 맞아 중앙의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것 보다 은거의 삶을 통하여 현실비판자로서의 입지를 지켜 나갔 다. 16세기에는 정치에 참여하여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당대를 난세로 인식하여 출사를 단념하고 초야에 은 둔한 일근의 선비들이 다수 형성 되었는데,이들 형제의 삶이 바 로이런시대적분위기와맥을같이하고있어주목되어왔다. 청도는 무오사화의 당사자인 김일손의 출신지이기도 했고,아 울러 밀양과 더불어 진주권이 중심인 경상우도와는 구분되는 경 상하도로 파악되지만,이곳의 학풍이나 학문적 교유범위는 경상 우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16세기 조선사회는 성리학이 正學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는 시기였지만 학문적인 분위기는 상 대적으로 자유로웠다.조식의 경우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인접학문에 경도되어 있었듯이,박하담이 호를 소요당이 라한것역시노장적인처세의일면을보여주고있다. 박하담은 중종 11년(1516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유일로 천거 받아현량과에추천되었으나응시하지않았다.이후출사표를포기 하고 청도의 운문산 아래의 눌연(訥淵)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이름하고여생을보냈다.그는기묘사화로조광조일파가처형되자 남았던전고(全稿)를다불태워버렸으며,임진왜란이후로는遺文 마저없어졌다고전한다.박하담에게있어서도16세기처사상을견 지한대부분의학자처럼사화의충격은매우컸음을알수있다.『소 요당일고』서문을 쓴 이돈우(李敦禹, 1801~1884)는 중종·명종대에 는정치와문화가융성하여조식·김대유·주세붕등과같은많은학 자들이배출되었는데박하담도그중의한명이었고,기묘사화와을 사사화이후에화를피하여은거했다고기록하고있을정도다. 박하담은 은거와 학문의 중심무대를 운문산으로 정했지만, 청 도는 동서로 길게 뻗은 중간 지점의 험준한 곰티재를 넘어야 하 기에 산동과 산서지역 왕래가 불편한 곳이다.그리하여 박하담은 산서의 수야마을에서 산동의 섶마루로 이주하여 별업을 마련하 였는데, 이곳이 바로 은거하기 좋은 운문산 자락이었다. 그가 남 긴 운문산부(雲門山賦)나 消遙堂記 등에서 학풍이나 처세가 단 계적으로 드러난다. 운문산 아래에 소요당을 짓고 유유자적하는 삶의 즐거움에 취하지만, 그는 결코 현실을 잊은 은둔자는 아니 었다.김대유와함께산동지역이군소재지와멀고길이험하여백 성들이 官家에 납부할 곡식을 운반하기가 불편하다는 향촌민들 의 민원을 적극 수용하여 사창(社倉)건립을 실현시켰으며,행단 을 설치하여 향촌민들과 향음주례를 익히는 등 적극적인 성리학 실천운동을벌여나갔다.사창건립이나향사례와향음주례가16 세기 사림파들이 향촌 주도권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향촌민들을 교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박하담 이야말로 16세기사림파학자들의전형적인모습을보여주고있다. 박하담 아래에는 성와공 박하청이 있었으며, 박하청 역시 그의 형이나 동생 박하징과 비슷한 학풍과 현실관을 보였던 것으로 보 인다. 그는 1481년에 출생했으며 호는 성와(城窩)인데, 소요당 문 집에서 찾은 그에관한 기록을 보면,‘기묘사화후 형제수두문 강구 경리(己卯士禍後 兄弟遂杜門 講究經理)’란 내용처럼, 기묘사화가 은거의 생활로 들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런데 기묘사화가 있고 2년 후 재차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박하담 형제에게는 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중종 16년(1521) 안 당의 아들 안처겸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주역 남곤과 심정 등을 숙 청하고 景明君(숙의홍씨 소생, 성종 열째 아들) 추대를 모의했다 는 역모죄로 처절되었는데, 안당이 우당 박융의 외손자이니, 이들 에겐 외5촌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옆 동네 김일손이 무오사화로 처형당한 이후 연이어 벌어진 사화 속에서 출사를 포기하고 은거 형 처사로 살아갔던 박하담 형제들은 비슷한 학풍과 현실관을 보 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남아 있는 시를 보면 주로 3형제끼리 주고받은것이많은데,그만큼돈독한우의를다진것으로보인다. 박하담과 5살 터울인 막내 하징은 성종 14년 (1483)청도 池內 里에서 출생하여 3~4세 때부터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여,주로 백 형인 소요당을 따라 운문산 기슭의 입암과 訥淵에서 사서를 탐 독하였으니, 소요당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나이 15살 되던 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 처형을 몸소 경험하였고,2 1살이 되던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족숙(11촌)이던 오졸재 박 한주가 처형되었으니, 그의 젊은 시절은 매우 급박했던 정치상 황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향내의 삼족당 김대유를 비롯하여 경상우도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조남명은 물론이고,파 주의 청송 성수침과 충주의 탄수 이연경 등 기호사림계의 인사 들과도폭넓게교류한점이이채롭다. 32살이 되던 중종 10년(1515) 천거로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자, 그의 심정을 시로 남기는 동시에 탄수 이연경에게 서신을 보내 관 직에 뜻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入對한 후 옛 제 왕 을 도 와 임 금 은 모 름 지 기 德 에 힘 을 쏟 아 야 한 다 고 건 의 하고 물러나,송도로 가서 고조부 충숙공 朴翊의 유허지를 둘러보 고감회에젓기도했다.천거로사간원정언에제수되었다는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데, 이는 이조판서로 인사권을 쥐고 있 던 안당의 영향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이 시기는 인사권을 장 악한안당이조광조를비롯한신진세력들을적극적으로천거하던 시기였고, 아울러 안당이 박융(박하징 曾祖)의 외손자였다는 점 을 감안 한다면 외5촌 조카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 나박하징은끝내관직에뜻을접었고,기묘사화후더욱학문에만 정진하게되었다.이리하여수석이아름다운귀일곡(歸一谷,현재 수야4리)에서 석대를 쌓고 두어 무(畝, 100步)의 땅에 연못을 만 들었는데,이것이대대로전해내려오는별업(別業)이다. ▶다음호에계속 조선선비촌청도군이서면수야리의소고공 박건후예들 선조 유지를찾아븣 수야리전경입구마을부터수야지넘어까지광활하다.마을에는소공공후예의재사(齋舍)와등유적이즐비하여당시의세(勢)를확 인할수있다. 용강서원(경상북도문화재제129호) 청도군이서면학산1리. 1590년수야리입향조소고공의묘소아래분암(墳庵)을창건하여용강 재라편액하고이후용강재 경내에충열사를창건하고임란14의사위판을봉안하고춘추사림봉사하였으며,1835년소고공의조부송은박익선생의영정이出 現되어충열사에주벽으로봉 안하고향화를받들다1868년훼철되었다가1913년향중의공의로송은선생 묘우를복원하여묘호(廟號)를‘송은선생영당’이라편 액하여춘추로사림봉사하다, 1960년강당을중건하고송은선생영당을麗忠祠로서당을서원으로개편하여여충사와충열사에춘추로사림봉사하고있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