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page


69page

가인 김병로 Gain Kim Byungro(1887~1964) 옛주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731 / 현주소: 도봉구 도봉로134길 14 (창동 731-43)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 발전을 위하여 애썼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독재와 맞서 싸운 영원한 민족지도자였다. 도봉구와의 인연은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제한받자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으로 은둔하면서 맺었다. 그는 담양 용추사에서 항일운동가 최익현의 열변에 감동을 받은 뒤 1906년 동지들을 모아 일인보좌청을 습격하면서 항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의병투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계몽.자강운동으로 눈을 돌리고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5년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잠시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김상옥 의거(1923년), 6·10만세운동(1926년), 간도 공산당사건(1928년), 원산파업사건(1929년), 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사건(1932년) 등의 '시국 사건'에 무료 변론을 맡아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신간회(新幹會)활동에 앞장서 직접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에도 관여했다. 광주학생운동때에는 진상조사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 군정척의 사법부장 등을맡아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1,2대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법조협회 회장을 맡아 사법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이승만 독재에 맞섰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종식을 촉구하면서 야권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4년 창동리로 이주하여 집을 짓고, 논을 장만해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2년 전에는 닭 1,500마리를 키웠으나 사료를 구하려면 일본 관리에게 아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닭을 모두 처분해 버렸다. 김병로가 창동리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 창동리로 이주해 창동은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됐다. 일제는 이들 '요시찰(要視察)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함께 산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고 불렀다.
69page

고하 송진우 Goha Song Jinwoo (1890~1945) 옛주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81-1 / 현주소: 도봉구 창동 219-5 삼풍유치원 부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중앙학교 교장으로 3·1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 지도자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18년 말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방안을 논의했고, 1919년 3·1운동으로 결실을 보았다. 3·1운동을 주동한 48인의 한 분으로 며칠 뒤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1940년 폐간될 때까지 20여 년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압제를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설립운동(1922년), 물산장려운동(1923년), 동포위문 활동(1923년),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1931~1935년) 등을 통해 줄기차게 민족자강운동을 폈다. 국내외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연결하고 자금지원을 하거나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계속했다. 또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삼성사 건립을 시도하고(1917), 아산 현충사를 중수(1931) 했으며, 평남 강동의 단군릉을 보수했다(1934).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보도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언론인이었다. 광복이 된 후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국민대회준비회와 환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건국 준비를 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 시 대표 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반탁을 강력히 주장한 임시정부요인들과는 달리 '신중한 반탁론'을 펼이다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가 김병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에 정착하자 송진우도 창동리 281-1(현재 삼풍유치원 부지)에 직접 한옥을 짓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살았다. 사람들은 함께 창동에 살던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