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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4월 25일,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은 선언문을 채 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 운 대규모의 시위 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 경찰·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 4·19에 대한 명칭은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 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T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