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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개인 적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제적으로 많은 공 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노령으로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張勉)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李起鵬)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 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 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경과 및 결과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 산의 시민들은 총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해변가에 버려진 16살 난 소년의 시 체를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하여 체포 당했음에 틀림없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 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1960년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 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전국적으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 Ver.3 The Gwangju 5·18 Road Guide map book 2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