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page

“차명숙입니다. 지금 안동에서 ‘행복한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홍어를 팔아 요. 아마, 안동에서 홍어 파는 집은 나뿐일 겁니다. 안동사람들 주머니 좀 털 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안동사람들 주머니 잘 안 엽니다. 홍어 사러 와 서 내 말투를 듣고 어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31년 전 80년 5월, 차명숙 씨는 나이 열아홉 살에 대학 학비 벌이로 광주에 있 는 한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어려 운 집안 형편에 넷째 딸을 대학에 보내 줄 리 만무했고 혼자 일해서 대학을 가 는 수밖에 없어 선택한 길이었다. 당시 성당 활동도 열심히 했다. 사회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 덕이었다. 5월 16일 저녁.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는 나주에 있는 성당에 잠시 머물다 올라온 터라 광주 분위기가 생소했다. 으스스하고 고요하고 무서운 기운이 스 멀스멀 느껴지는 그런 밤이었다. “나중에 안 상황입니다만, 계엄령으로 지도부는 이미 다 모셔간 후였고, 그 래서 누가 지휘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래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하기로 했어요. 대인동 전파사에서 앰프를 빌렸습니다. 그리고 전춘심과 함께 방송을 시작했어요.” 5월 중순, 더운 날들이었다. 씻고 옷 갈아입고 밥 먹는 일은 광주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씻고 싶다고 하면 씻으라 했고 옷도 나눠 줬다. 광주가 하나의 공동 체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쟁의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간첩 협의를 쓰 고 항쟁 중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안대에서 당한 고문은 생각하기도 싫 을 정도로 지독했다. 그는 고정간첩으로 몰린 탓에 ‘10만명을 동원했고 200 명을 죽였다’는 죄로 실형을 받고 16개월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 뒤 형집행정 지로 석방이 되었다. 집에 갔더니 이미 아버지·어머니·언니가 모두 사망하고 없었다. 그의 부모님이 수감되거나 고문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딸 하나 때 문에 받은 스트레스로 온 가족이 파탄이 난 것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이 사망하거나 구속되 고, 남동생·여동생·자식이 사망 혹은 구속당하고 나면 그 뒷바라지 는 모두 어머니, 여성들이 담당했습니다. 80년 5·18은 여성과 어머 니들의 수발이 없었으면 절대로 그렇게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없 었을 겁니다.” 80년 오월 공동세상은 ‘어머니의 힘’이었다 당시 가두방송 나섰던 차명숙 씨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