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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이야기하다 노동과 삶의 고민을 나눴던 ‘들불야학당’ ‘들불’이라는 이름은 들불야학 창립멤버였던 박기순 열사가 제안한 것 으로 전해진다. 소설가 유현종이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 『들 불』을 읽고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의 뜻을 기리자’는 의미였다고 한 다. 들불야학은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으로 출발해 70년대 말 노 동운동과 학생운동, 주민운동의 불을 지폈고, 오월항쟁의 한복판에서 활활 타올랐다. 야학교사들은 스스로를 ‘강학’이라 했다. 가르칠 강(講)자에 배울 학(學) 자를 썼는데 가르치면서 동시에 노동청소년들에게 배우겠다는 믿음 때 문이었다. 박기순 열사는 야학을 세운 그해 겨울 불의의 사고로 숨졌고 이후 윤상원 열사와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오월을 대표하는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들의 영혼 결혼을 기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박기순 열사 이후 들불야학 출신들의 고난은 이어졌다. 윤상원, 박용준 열사가 항쟁의 마지막 날 계엄군의 총에 사망했고, 82년엔 박관현 열사 가 40여 일간의 교도소 단식투쟁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항쟁 이후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던 신영일 열사는 과로로 88년에, 들불과 함께 광천동 주민운동 시대를 열던 김영철 열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98년에, 이른바 ‘오월극’이라는 장르를 거처간 박효선 열사는 암으로 98년에 각각 생을 마감했다. 20년 사이에 모두 7명이었고 이들이 살았던 삶은 평균 32년 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아울러 ‘들불 7열사’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