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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일 1958~1988. 5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중 무기정학을 당한 뒤 박기순 등과 들불 야학 준비 팀에 합류한다. 들불야학 학당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 로 창립 초기부터 적극적이었고, 국사 담당 강학으로 활동했다. 오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 재건에 매달렸고, 광주지역 청년운동에 헌신했다. 고문과 부상, 단식투쟁의 후유증, 피로 누적으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 을 떠났다. 김영철 1948~1998. 8 지역 명문이었던 서중·일고를 나왔으나 가난한 탓에 공무원이 됐다. 그 러나 공직비리에 염증을 느껴 소외받은 삶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YWCA신협과 인연을 맺는다. 77년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주민 운동’을 하던 중 들불야학과 만났다. 항쟁지도부의 기획실장으로 도청 에서 저항하다 체포됐다. 이후 고문후유증으로 그의 의식은 98년 죽는 순간까지 ‘광주 5월’에 머물러 있었다. 박효선 1954~1998. 9 79년 여름, 야학 학생들과 연극작업을 하면서 문화담당 특별강학으로 서 들불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극회 ‘광대’를 꾸리다 80년 오월항쟁에 투 신, 도청지도부 홍보부장으로서 항쟁을 이끌었다. 3개월 여의 옥고와 20개월간의 수배생활을 청산한 뒤 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단, 44세를 일 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오월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에 천착했다. 박관현 1953~1982. 10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법대생에서 광주공단실태조사에 나섰다가 들불 강학으로, 그리고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항쟁의 불을 지폈다. 5·17 계엄직후 수배생활 중에는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2년 가까운 도 피생활을 하다 붙잡힌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오월항쟁 진상규명과 교도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40여 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다 운명을 달리했다. Ver.3 The Gwangju 5·18 Road Guide map book 11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