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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5월31일 수요일 6 (제125호) 관향조 종친회 밀성박씨 은산부원군 후 충간공 순찰사파 고창 입향조 충간 공의증손양오공(휘서봉)이다. 대대로 경남 밀양에서 세거하던 문중이 고창군 고수면 장두 리의입향은연산군때무오사화가직접적인원인이다. 양오공의 아버지 춘파공(春坡公,휘 윤추)은 점필재( 탕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한훤당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 두 정여창(一 뜻 鄭汝昌) 등과 도의지교로 사귀었으며, 연산군 이 즉위하여 정사가 어지럽고 방탕한 생활로 이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鄕里,밀양)으로 돌아와 후생(後生)계도(啓導)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과 폭정은 신진사류가 대거 포 진한 사간원의 지적이 담겨진 상소가 이어졌고,이를 틈타 유자 광을 중심으로 한훈구파는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록을편찬 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것이이극돈을통하여연산군에게알려지면서무오사화로 이어졌고, 연산군이 생모인 윤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 게되는갑자사화로이어졌다. 이과정에스승인점필재와그의문인들인일두,한훤당등많 은 제자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이에 양오공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 춘파공의 문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와 함께 가솔을 데리고 전남 무안에 은거하고 본관 을 무안인으로 하여 살다가 다시 고창 추산봉아래 산양동(山陽 洞, 현 고수면 초내리)에 은거(隱居)하여 예설(禮設)을 강론하 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후에 일세기(一世紀) 반 동안 가문(家 門)의 세력이나 살림이 궁핍한 후손들이 산양동(山陽洞)에서 장두, 포동, 초내, 월계등지(獐頭蒲洞草乃溪月等地)로 이산(離 散)해 살다가 양오공의 증손 인순(仁純)의 현손 사일(玄孫師 一)이 아우 사의(師義를 거느리고 정조 기 해(己亥, 1779년)에 고창현대아면중화표리(高敞縣大雅面中華表里(現고창군 아 산면 중복리로 와서 박달(朴達)이란 뜻으로 단목(檀木)을 집 뒷산에 심고 단음(檀陰)이라 호(號)하니 이로부터 세거(世居) 하기 이백 여년에 자손(子孫)이 번성(繁盛)하여 아산면, 고수 면, 신림면을 비롯 인근의 정읍과 영광등지에 산재하며 지역의 토호로자리잡아지금에이른다. 양오공의 휘(諱)는 서봉(瑞鳳),자(字)는 성봉(聖徽)이며 호 (號)는 양오(陽梧)본관은 밀성(密城)이다. 밀성대군 휘언침(密城大君 諱彦 )을 관조(貫祖)로 하고 고려태사중서령문하시중도평의사(高麗太師中書令門下市中都 評議事)에 밀성부원군 휘언부(密城府院君 諱彦孚)를 중조(中 祖)로 하여 문하시중(門下市中)으로 원제(元帝)의 예우(禮遇) 를 받아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귀국 후 밀성군(歸國後密城 君)으로 추봉(追封)된 문익공 효신(文翼公 孝臣)이 그의 상계 (上系)이다. 고조(高祖) 휘(諱) 영균(永均~1300)은 양효공 간의 큰아들 이다.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제(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되었다. 뒤에 또 은산부원군(銀山 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고 묘소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마을 뒤 을좌(乙坐) 구릉에 있 다. 부인은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의( 陞)의 딸이다. 배위(配位) 재령이씨 (載寧李氏)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인 재령백(載寧伯)을 지낸 우 칭(禹稱)의후손이다. 슬하에 아들 셋 딸 넷을 두었는데 첫째는 익(翊 : 초휘는 天 翊)이요,둘째는천경(天卿),셋째는문경(文卿)이다. 셋째 휘 문경이 곧 양오공의 증조부가 된다. 증조부 휘 문경 (文卿)의 자는 성시(聖始), 호는 송재(松齎)이다. 공민왕조에 등재하였으나 고려말에 맏형(伯仲氏, 송은선생)과 둘째 형 전 객령공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공은 과천(남서울)에 물러났 다.그러나 이조에 다시 충청도 순찰사를 거쳐 이조판서를 추증 받았으며시호는충간(忠簡)이다. 충간공의 아들 휘 민(敏)은 교리(校理)로서 호(號)가 성헌 (惺軒)으로 양오공의 조부이다. 고(考)의 휘(諱)는 윤추(允樞 諱 信樞)니 호는 춘파(號 春坡)인데 조년(早年)에 진사(進士) 하여 태학(太學)에서 강론(講論)이 특출(特出)했고 점필재선 생( 탕畢齋先生)에게 종학(從學)하고 한훤당 김굉핑 일두 정여 창(寒喧 一 亮)등 제현(諸賢)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했는데 연산(燕山)이 즉위(卽位)하여 정사(政事)가 어지럽고 한피 앞 을 내다볼 수 없어 향리(鄕里)로 은퇴(隱退)해서 후생계도(後 生啓導)에 전념(專念)하였다. 양오공은 춘파공과 어머니 태인박씨와의 사이에 차남으로 세 조 계미(癸未, 1463년)에 태어났다. 백형(伯兄) 휘 서란(瑞鸞) 은 문과에 올라 경기도사(京畿都事) 재임 시 무오사화로 아들 과함께화를입었으나신원되지못하였다. 양오공은 용모(容貌)가 단정(端正)하고 기개와 도량이 남보 다 뛰어나게 슬기롭고 총명하여 훈화(訓話)를 들으면 다 기억 (記憶)하고 선행(善行)을 보면 다 모범(模範)하였다. 8세에 입 학(入學)하여 부지런히 독습(讀習)하며 효행(孝行)하였고 겨 우 15세 때 경전(經傳)의 깨달음이 빠르고 학문이 뛰어나 성종 계묘(成宗癸卯, 1483년)에 진사(進士)하고 익년(翌年)에 등과 (登科)하여 박사 전적 도사 익례 필선 동지중추(博士典籍都事 翊禮弼善同知中樞)등을 역임(歷任)하고 경상도관찰사(慶尙道 觀察使)가 되었으나 노친(老親)을 모시기 위해 사직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춘파공을 간호함에 있어 밤잠도 안자 고 정성을 다하여 큰 효험이 있으니 모두들 그의 효도(孝道)를 칭찬(稱讚)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노친(老親,늙은 부모)의 스승인 점필 재 김종직을 비롯한 문인들이 대화(大禍)를 입어 일가(一家)에 화해(禍害)가 미치게 되자 가솔들을 데리고 밀양(密陽)사포리 (현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를 떠나 무안(務安)등지로 전전하다 가고창추산봉아래산양동에은거(隱居)하였다. 가계(家系)를 감추고 무안인(務安人)으로 자처(自處)하니 사람들이그의소종래(所從來)를알지못했다. 양오공의 어머니 태인박씨의 족보를 보면 지금도 무안인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음은 무오·갑자사화를 피하기 위해 철저히 신분을속였음을알수있다. 어머니 태인박씨는 증 이조판서 휘 종원의 따님으로 감사원 이 뽑은 조선시대 3대 청백리의 한분이신 아곡 박수량 선생의 누이이기도하다. 으슥하고 좁고 쓸쓸한 곳을 찾아 초가수간(草家數間)을 지어 매일 소학심경 근사록(小學心經近思錄)등을 읽고 역리(易理) 를 탐구(探求)하여 예설(禮說)을 강론(講論)하고 심의제도(深 衣制度)를 초록(抄錄)하며 때로는 구름이 걸쳐있는 듯 물과 돌 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찾아 소요(逍遙)하면서 쌓인회포(懷抱)를달래었다. 특히 선생이 심의제도를 실상에 맞도록 간추려 기록하여 보 급한 것은 아마도 예학의 대가 사계 김장생 선생보다 앞선 것으 로 예학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친상(親喪)을 당(當)해서는 초종범절(初終凡節)을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衣)하 고 3년 동안 애통(哀痛)함이 언제나 초상(初喪)때 같았으며 제 사(祭祀)에 여재(如在)의 정성(精誠)을 다하니 고창출신의 유 학자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인이었던 인천 변성온(仁川 卞成 溫)과 곤암 변성진 형제( 綺巖卞成振兄弟)가 종학(從學)하면서 흠모(欽慕)해마지않았다. 선조경오(宣祖 庚午, 1570년) 10월 14일에 졸(卒)하니 108세 (百八歲)의 고수(高壽)로서 성송면(星松面) 포동(蒲洞) 앞 성 적동(聖蹟洞) 유좌(酉坐)의 원(原)에 장사(葬師)하였다 배 (配)는 정부인 진주정씨(貞夫人 晋州鄭氏)니 참봉 호( 핫奉皓) 의 여(女)로서 부덕(婦德)이 있었으며 세조임오(世祖壬午,140 2년)8월 20일에 태어나 명종 기유(明宗 己酉,1549년)11월 23일 에 졸(卒)하니 묘(墓)는 합폄(合 )이다. 2남(二男)을 낳았으니 장(長)에 송영(松齡)은 一女를 두어 창녕(昌寧) 조여일(曺汝一)에게 가서 흡(洽)과 환(渙)을 生하 고 차(次)에 송남(松楠)은 一男 정림(挺林)을 두고 정림이 5남 (五男) 인의(仁義, 一 諱 義) 인서(仁瑞) 인명(仁明) 인순(仁 純) 인채(仁采)를 두어 크게 번성하였는데 인의(仁義)는 무과 만호(武科萬戶)로 정충신문하(鄭忠信門下)에서 병자호란(丙 子胡亂)을 만나 동생 인순(仁純)과 더불어 의거(義擧)하면서 비로소 보관되어 전해온 유서(遺書)를 내보니 밀성세족(密城 世族)으로서 이향(離鄕)하여 둔적(遁蹟)한 사유(事由)가 소상 (昭詳)한지라 전일 무안인(前日務安人)이라함은 세속을 피하 기(둔세,遁世)를위함이었다. 드디어 모병(募兵)하여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의 휘하(麾 下)에 들어가 수원광교산(水原光敎山) 싸움에서 적장(敵將) 양고리(楊古利)를 사살(射殺)함으로서 청군(淸軍)이 크게 무 너졌는데 굴욕적(屈辱的)인 화약(和約)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痛哭)하며 귀향(歸鄕)하여 그의 전공(戰功)도 숨기 고종적( 팍迹)을감추었다. 고창 방장산에 있는 양고살재는 양고리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한다. 삼남 인순(仁純)은 백형(伯兄) 인의(仁義)와 더불어 병자호 란에 크게 활동하여 세칭 장열의사(壯烈義士)로 호남절의록과 고창읍지에전해진다. /글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 은산부원군후충간공파고창문 중 희구정(喜懼亭)-1540년입향조양오공께서건립후소실되었다가1988년중건된정자로 양오공이 예학을강론한 유서깊은정자이 다.(고수면장두마을) 입향조양오공추모비(고창군아산면중복마을) 뱚집성촌 탐방 고창군은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정읍시, 부안군, 장성군, 영광군에 인접하고 서북부 일대는 서해에임하고있다 현재 고창군은 전라북도 6시 8군의하나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고창,무장,흥덕세고을이병합되 어 생긴 명칭으로 1914년 3군은 병합하여17면으로 갈랐다가1935년오산,벽사,석곡3면을없애그이 웃에 편입시켜 14면으로 되고, 1955년 고창면이 읍 으로승격되어1읍13면의체제로지금에이르고있 다. 밀성박씨 은산부원군파 고창문중은 고창군 아산면 과 고수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인근 정읍시, 영광군에도몇세대가거주하고있어찾아가본다. 뱚입향약사(入鄕略史) 뱚입향조양오공의세계(世系 ) 추원재-입향조양오공의아버지춘파공이하 선조님재사(齋舍)이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