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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5월31일 수요일 12 (제125호) 기획 용담(龍潭)박이장(朴而章:1547~1622)은남명학파(南冥學派)에속하는대표적인학자관료의한사람이다.그 는문과에급제한후관직에진출하여부제학 (副提學),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도승지(都承旨)등의청요직(淸要職)을역임하는 등 중앙정계에서 크게활약하였고,경연관(經筵 官),시강원(侍講院)보덕(輔德)등의직책을맡아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등당시군주들을교육하면서가 까이에서모신적이있다.그는23세때남명(南 冥)조식(曺植)을만나뵌이래로남명학파와인연을맺어남명의제자들을스승이나벗으로삼아어울리면서 학문을하였고,늘남명학파에관심을두었다. 나중에 정권을 잡은 대북파(大北派)와는 거리를 두었지만,서울이나 경북지역에서 남명학을 전파하는 위치에 있었다.세상에 한강(寒岡)정구(鄭逑)의 제자 로 알 려 져 있 지 만 그 의 연 령 으 로 볼 때 한 강 의 제 자 로 보 기 는 어 렵 다 . 그 는 나중에는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 )과관계가악화되었지만,젊었을때는정인홍 의문하를출입하였으니,그의제자인것을부인하기어렵다.또소재( 奔齋)노수신(盧守愼)의제자이기도하다 .그의시문은원래많았을것이나그가만년에 강학하던모덕와(慕德窩)에화재가나는바람에,대부분의원고가소실되어버렸다.장기간후손들이수집하여 1911년에가서야겨우출간하여세상에반급 (頒給)될수있었다.이번호에서는그의생애를자세히소개하고,그의사우관계(師友關係),학문사상등을알아 본다. 박이장의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 본 관은 순천(順天)으로 1547년 11월 27일 합천군(陜 川郡) 남교리(藍橋里)에서 태어났다. 순천박씨는 원래고려개국공신박영규(朴英規)의후손이다. 용담의 선대는 대대로 개성(開城)에서 살았는 데,그의 6대조 박가권(朴可權)이 성주(星州)수륜 동(修倫洞)으로 옮겨와 살아 비로소 경상도 사람 이 되었다. 고조 박예손(朴禮孫) 때 남교리로 옮겨 와 살았다. 부친은 복재(復齋) 박량좌(朴良佐)인 데, 승지를 지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 弼)선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모 친은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지낸 배은(裵 垠)의따님인데,본관은성산(星山)이다. 용담은 1553년 7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끔 조자(造字)의 의미에 대해 묻기도 하고, 또 “하늘은 어디에 붙어 있느냐? 땅은 어디서 끝나느 냐”등등의 질문을 하니, 부친이 주자(朱子)가“하 늘 위에는 무엇이 있느냐?”라고 질문한 것과 비교 하여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고,용담을 본 사람들은 원대한인물이될것으로기대했다. 1569년 23세 때 진주(晋州)덕산(德山)으로 가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만나 뵈었다. 이 때 덕계 (德溪) 오건(吳健), 옥계(玉溪) 노진(盧縝), 개암 (介庵) 강익(姜翼),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죙), 한강(寒岡)정구(鄭 逑),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각재(覺齋) 하항(河沆)등남명의제자들과강학을하였다. 1573년27세때진사와생원에다합격하였다. 1574년 성균관 동쪽에서 소재( 奔齋) 노수신(盧 守愼)을 뵙고 소재가 지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 辨)〉에대해서토론했다. 1576년30세때기자전(箕子殿)참봉에제수되었으 나나아가지않았다.관혼촬요(冠婚撮要)를지었다. 1577년에 영숭전(永崇殿) 참봉에 제수되어, 처 음으로 관직에 나갔다.관직에 있으면서 주자서(朱 子書)와 주역을 강독하여 마지 않으니, 사람들이 ‘독서참봉’이라일컬었다. 1780년, 34세 때 이정전서(二程全書)가운데서 성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내용을 뽑아서 정서 절요(程書節要)를만들었다. 1582년에는 육경(六經)의 요점을 뽑아 육경려해 (六經련海)를지었다. 1583년에는 부친을 모시고 고령(高靈)의 용담리 (龍潭里)로옮겨가살았다. 1586년 40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 院) 정자(正字)에 제수 되었다. 상촌(象村) 신흠 (申欽),유천(柳川)한준겸(韓浚謙)등과동방급제 하였다. 곧 한림(翰林)이 되었다. 선조(宣祖)를 야 대(夜對)하였는데 선조가 임금의 덕(德)에 대해서 물었다.용담은,“백성의고락(苦樂)은임금의덕에 달려 있는데,덕이란 것은 마음에 도리를 갖추는 것 입니다. 사욕이 그 도리를 덮어 버릴 수 있으니, 항 상존양(存養)성찰하는노력이없으면마음의도리 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성 (誠)과 경(敬)의 요점을 이야기 했고, 성색(聲色) 과 교일(驕佚)에 대한 경계와 간사한 인간들이 임 금을 막는 것에 대한 우려 등에 대해서 언급했다. 또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경(敬)과 태(怠)의 관계등에대해서도상세히이야기해주었다. 선조가 궁중의 좋은 술과 귤을 선물하고 내시들 로 하여금 돌아가는 길을 인도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당시사람들이아주영광으로생각하였다. 1588년에는 예문관 대교(待敎)에 제수되었다.이 해소재( 奔齋)를만나의례(儀禮)를강론하였다. 1589년 43세 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지 제교(知製敎),경연(經筵) 검토관(檢討官)시독관 (侍讀官)등에 임명되었다. 1590년2월에한강(寒岡)정구(鄭逑),모계(茅谿)문 위(文緯) 등과 마암(馬巖)에서 심경(心經)을 강론하 였다. 3월에는 호남(湖南)의 민심을 선부(宣撫)하는 역할을맡아성공적으로문제를해결하고돌아왔다. 1591년 5월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 이되어명나라에갔다.당시왜인들이조선조정에 글을 보냈는데, “명나라를 징벌하러 갈 것이니, 조 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 을 명나라에 사실대로 알릴 것이냐 숨길 것이냐로 조정에서 논란이 있었는데, 용담은 사실대로 왜의 사정을 바로 알릴 것을 주장했다. 황제가 사실대로 보고한것을기뻐하여몇수레의서적을하사했다. 1592년1월에사간원정언에제수되었으나,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4월에 왜적이 대규모로 침략해오 자,창의하여왜적을쳤다.용담은향병(鄕兵)을모아 송암(松菴) 김면(金沔),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 등과 연합하여 왜적의 흉봉(凶鋒)을 막아 경상도 지 방을 보호하였다. 가을에는 초유사(招鍮使) 김성일 (金誠一)의종사관(從事官)에임명되어군무를논의 하였다. 9월에 호남(湖南)에서 군량 1천포를 가져와 경상우도지역의군민(軍民)들을구제하였다. 1593년6월평안도영유현(永柔縣)으로가서국왕의 행차를 호종(扈從)하였는데, 10월에 한성(漢城)으로 돌아왔다.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11월 이후로 이조좌랑,의정부 검상(檢詳),사인(舍人)등에 임명되었다.이조판서김응남(金應南)은용담을‘영남 의제일가는인물’이라하여추천했던것이다. 1594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이 때 전라감사 가 ‘일본과 강화(講和)를 해서 백성들을 살리자’고 요청했다.용담은상소하여일본과의화의를배척하 였고, 안변기무(安邊機務)8조를 올렸다. 팔조는 ‘감 사와 수령을 잘 선택할 것’, ‘장수를 잘 선발하여 군 사를 훈련할 것’, ‘둔전을 만들어 곡식을 창고에 쌓 아둘 것’, ‘지형을 잘 살펴 험요한 곳을 차지할 것’, ‘세금을 적게 거두고 재물을 아껴 쓸 것’,‘군인과 백 성들을 어루만져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도록 할 것,’ ‘인재를 등용하되 품계에 얽매이지 말 것’,‘신의를 세워간사하고교활한자를막을것’등이었다. 11월에는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죙)에게 편지 를 보내 최수우당(崔守愚堂)을 신원(伸寃)하는 일 에 대해서 논의했다. 수우당(守愚堂)은 남명(南 冥)의 제자 가운데서 선배 그룹에 속하는 개결한 선비였는데 기축옥사(己丑獄事)때 억울하게 걸려 희생당했기때문이었다. 1595년 순창부사(淳昌府使)에제수되어부임하러 가다가,한강을건너기전에홍문관교리에제수되었 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박이장은 재주와 덕이 아 울러 갖추어졌고 학식이 풍부하니,그를 경연(經筵) 에 있게 해서 고문에 응하게 해야 합니다.조그만 고 을원을 맡기는 것은 조정을 실망하게 하는 것입니 다”라고 아뢰었으므로 선조가 바로 불러와 교리를 맡긴 것이었다.그때부터 경연 강관(講官)의 임무를 수행하는데,선조에게주역을강의하였다. 1597년 11월에 수원부사로 제수되었다. 그 이듬 해수원지(水原志)의편찬을마쳤다. 1599년 부친상,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주자가 례(朱子家禮) 그대로 준행하여 예법이나 인정이 다잘갖추어졌다. 1601년 여름에 탈상하고서 11월에 성균관 전적 (典籍)에 제수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병으로 귀향 하였다.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선무원종공 신(宣武原從功臣)에모두 책록(策錄)되었다. 1602년 정월 사헌부 집의에 제수된 이후로 1614 년까지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전한(典翰), 직제 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시강원 필선(弼善), 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 旨), 좌승지, 도승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 諫), 이조참의, 참판, 대호군(大護軍), 예조참판, 대 사헌한성부(漢城府)좌윤(左尹)등직을역임했다. 세자시강원에서는 서경〈무일편(無逸篇)〉을 강 의 했는데, 안일하게 지내는 잘못과 궁중에서 물자 를 허비하고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는 폐단 등에 대 해서 아뢰었다. 마음을 바로잡아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간쟁을 받아들이고 다스리는 도리를 강구하 고 정일(精一)의 공부에 힘을 쓸 것을 요청했다.전 한으로 있으면서,수우당(守愚堂)최영경(崔永慶) 의신원(伸寃)을계청(啓請)하였다. 1603년 3월 충청도 목천(木川)에 물러나 한강 등 과예설에대해서강론했다. 6월에는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가 되어 중 국을 다녀왔다. 개성에 이르러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의사당에참배하였다. 1604년 58세 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무함 당한 것을 신변(伸辨)하였다. 당시 오현(五 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 데, 회재와 퇴계를 비판한 사람이 있었기에, 용담 이신변에나섰다. 1605년 붕당의 폐단을 논하다가 시의(時議)를 거 슬려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좌천되었다. 영해지 (寧海志)를 편찬하였다. 겨울에 다시 병지참판 겸 승문원(承文院)부제조(副提調)에제수되었다. 1606년 봄에 다시 단양군수(丹陽郡守)로 좌천되었 다. 학교를 일으키고 향약을 실시하여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였다.이 해 서울에서 증광시(增廣試)를 주 관했다. 김주(金輳)라는 선비가‘퇴계의 의리지학(義 理之學)이간악한자들에게무해(誣害)를입고있다’ 라는 취지로 결론을 내렸는데, 용담이 뽑으려 하자, 권력을잡은자의측근으로시관이된자가반대하자, 용담은선현에게해가미칠까염려되어뽑지않았다. 1607년 성주 무흘산(武屹山)에서 강학하였고, 한 강과 예설을 논했다. 현풍(玄風)에 이르러 도동서원 (道東書院)과한훤당(寒暄堂)의묘소를참배하였다. 1608년 진보(眞寶)삼매촌(三昧村)으로 옮겨 임 시로살았다. 1609년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참배하였다.이 때 한강, 동계(桐溪) 정온(鄭蘊), 부사(浮査) 성여 신(成汝信),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등과 함 께서원록(書院錄)을중수하였다. 1614년 1월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 하려 는 상 소 를 했 다 가 청 송 감 무 관 (靑 松 監 務 官 )으 로 좌천되었다가,가을에파면되었다. 아들을 보내어 대정(大靜)으로 유배되는 동계 (桐溪)정온(鄭蘊)을전송하였다. 1615년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또 인목대비(仁穆 大妃)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항의하는 뜻으 로만언소(萬言疏)를올렸는데비답을듣지못하고, 삭탈관직되어방축되었으므로진보로돌아갔다. 1617년 고령 용담리(龍潭里)로 돌아갔다. 향약 과 동규(洞規)를 지었고,매월 초하루마다 강회(講 會)를개최했다. 1691년 성주 연봉촌(延鳳村)으로 옮겨가 살았 다. 향리의 사람들이 강학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주 었는데 모덕와(慕德窩)라고 이름을 걸었다. 심경 요의(心經要義)를지었다. 1622년 향년 76세로 고종하였는데, 사림들이 모 여성주위곡(蝟谷)에안장하였다. 1625년 용주(龍州)조경(趙絅)이 행장을 지었고, 1726년백각(白閣)강현(姜金見)이신도비를지었다. 1678년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위패를 봉 안하였다. 1911년 후손 박인현(朴寅鉉) 등의 주관으로 용 담집(龍潭集)이간행되었다. 1990년에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 서 용담집(龍潭集)을 표점 영인하여 한국문집총간 (韓國文集叢刊)제56집에수록하여간행하였다. 용담(龍潭)은 영남에서 생장하였고, 그의 성학 과정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남명학파(南冥 學派)와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인물이 대부분이 다. 23세 때 덕산(德山)에서 남명(南冥) 조식(曺 植)을 만남으로 해서 남명학파와 인연을 맺었다. 이 때 남명의 주요 문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덕계 (德溪) 오건(吳健), 옥계(玉溪) 노진(盧縝), 동강 (東岡) 김우옹(金宇 죙), 한강(寒岡) 정구(鄭逑)수 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각재(覺齋) 하항 (河沆)등 남명의 제자들과 강학을 하였다.특히 경 학(經學)과예학(禮學)에관심이많았다. 1574년 소재( 奔齋)노수신(盧守愼)을 뵙고 스승 으로 섬겼다. 노재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 滉) 등의 제자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 자,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는 등 조선(朝鮮)의 관 각문학(館閣文學)의 대표적 문인이었다.성리학과 문학을 겸비한 인물이었는데, 용담의 경학에 조예 가 깊으면서 문학에 뛰어난 것은 소재의 영향이 컸 다고 생각된다. 소재와 인심(人心)과 도심에 대해 서논변하고,또예서(禮書)도배웠다. 관직에 있을 때는 오리(梧里)이원익(李元翼)을 따랐고, 이조판서 김응남(金應南)의 지우를 입었 고, 1591년 그를 상사(上使)로 하여 서장관으로 북경 (北京)에사행을다녀온적이있었다.춘호(春湖)유영 경(柳永慶)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정치적인 노선도 가까웠다. 설사(雪蓑) 남이공(南以恭)도 조정 에서 노선을 같이하며 가까이 지냈다. 학봉(鶴峯) 김 성일(金誠一)이 임진왜란 직후 초유사(招諭使)로 왔 을때그의종사관(從事官)이되어모셨다.1593년4월 학봉이진주(晋州)에서병사하자조문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동강(東岡) 김우옹 (金宇죙)은 같은 고을에 산 선배로서 가까이 지냈 다.한강에게는어떤일이있거나의문이나면반드 시 물었고, 백매원(百梅院), 봉비암(鳳飛巖) 등지 에서도학(道學)과예학(禮學)을강론했다.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은 용담이 젊은 시절 배웠으나,나중에는정치적노선을달리했다. 남명학파의 동계(桐溪) 정온(鄭蘊), 모계(茅谿) 문위(文緯),영무성(寧無成)하응도(河應圖)등도 남명학파내의학자로긴밀하게지냈다. 경정(敬亭)자암(紫巖)이민환(李民 ), 이민성 (李民宬)등과 절친하게 지냈다. 또 사명대사(四溟 大師)의문집에서문을쓰는등승려들과도교유가 있었고, 시도 주고받았다. 여타의 유학자들과 달리 불교에대해서도이해가깊었던것으로보인다. 31세 때부터 관직에 나가 관원생활을 시작했지 만 <주역(周易)>과 주자(朱子)의 글을 읽어 독서 랑(讀書郞)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독서를 좋 아했다. 1780년 34세 때 <이정전서(二程全書)>가운데서 성리학과 밀접한 관계 있는 내용만 뽑아서 <정서 절요(程書節要)>를만들었다.1582년 36세 때는 육 경(六經)의 요점만 가려 뽑아 <육경려해(六經 련 海)>를지었다. 그는 학문할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나, 40세 이후로는 관직에 종사하는 바람에 학문에 전념하 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그가 환갑을 맞이 했을 때, 이런 심경을 <자경음(自警吟)>이라는 시와 그 서 문에서밝히고있다. 『내가 조정에 오른 이래로 두 번 전쟁을 겪었고, 두 번 천자의 조정에 다녀왔다. 어정어정하는 사이 에 세월을 헛되어 다 보냈다. 일찍이 시를 지어 뜻 을나타내보였다. ‘한 평생토록 처음 뜻 이루지 못하여 부끄럽나니 / 해마다 허둥지둥하며 세 가지 남은 여가를 버렸 다네/ 풍진세상에 쉰살나이 잘못 보내버렸고/ 예 순살거백옥(遽佰玉)의나이공연히다되었네’』 경서가운데서 가장 많이 읽혔던 논어(論語)에 대해서이렇게보았다. 『‘논어’라는 책은 성인의 말씀과 행동을 기록한 것으로 만세의 모범이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 에게 효도하는 도리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부 리는방법등이갖추어지지않은것이없다. 군자다운 사람은 성인의 언행이 담긴 책은 스승 으로 삼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서 그 내용을 즐기고 뜻을 찾아서 체득하면,군자의 일상적인 행실이 되 니 어찌 칭찬할 것이 있겠는가? 소인이 성인의 언 행이 담긴 책을 보면 사악함을 제거하고 간교함을 멀리하는 말로 자기의 사욕을 물리치는 규범을 삼 을 수 있고, 명분을 바로잡고 나쁜 짓을 꾸짖는 논 의로자기를죄주는형구를삼을수있다.하나하나 의교훈이모두소인들이꺼리는것이다.』 <논 어 >의 가 치 와 그 책 을 읽 음 으 로 해 서 얻 게 되 는효용을잘정리하여소개하였다. 제자백가에대해서용담선생은이렇게평했다. ‘허탄한 것으로는 장자(莊子)와 열자(列子)의 이야기가 있고, 잡된 것으로는 주처와 노자(老子) 의 이 야 기 가 있 다 .’ 노장이나 불가의 설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 았음을 알 수 있다.용담은 백성의 고락(苦樂)은임 금의 덕에 달려있다고 보았다,덕이란 것은 마음에 도리를 갖추는 것인데 사욕이 그 도리를 덮어 버리 는데 항상 존양(存養) 성찰(省察) 하는 노력이 있 어야마음의도리를회복할수있다고보았다. 용담은 비록 사환을 오래했지만 천성적으로 산 수를아주좋아했다.용담은단순히산과물을좋아 한 것이 아니라 인(仁)과 지(智)를 기르기 위한 수 양의 차원에서 산수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곧 천인합일(天人合一)의경지를채득한것이었다. 면우 곽종석은 용담의 학문과 행실을 이렇게 전 반적으로평했다. 충정(忠貞)의 전통이 있는 가문을 이었고, 사우 (師友)들 사이에서 훈도를 받아 뜻은 전일(專一)하 고기개가매서웠고,학문은넉넉하고행실은닦이어 졌다. 안으로 쌓인 것이 크고 넓고도 두터웠으므로 밖으로나타난것이툭트였으면서도빛났다.출처진 퇴(出處進退)에 있어서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다스 려진 세상이거나 어지러운 세상이거나 간에 시종 한 결같이의리를따르며구차하지않았다.깔끔한마음 에확고하게빼앗을수없는지절(志節)이있었다. 집안을 다스릴 때는 효도와 공경을 하고 자신을 단속하는 데는 장엄하면서도 긍지가 있었고, 관직 에 나가서는 맑고 신중했다. 백성들을 사랑하여 측 은하게 여기는 것 등에서 그 학문의 공력이 헛되지 않았음을알수있다. 문장은 법도에 맞으면서도 아름다웠다.원래 저술 이 풍부했다. 지은 책으로는 ‘관혼촬요(冠婚撮要)’, ‘정서절요(程書節要)’, ‘육경려해(六經련海)’, ‘심경 촬요(心經撮要)’, ‘상재만록(桑梓漫錄)’ 등이 있었 으나 그의 서재인 ‘모덕와’불타는 바람에 다 없어지 고말았다. /글허권수교수(경상대학교한문학과) 남명학파의대표적인학자관료용담 박이장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용담정사전경-경남산청군신등면단계리. 용담선생의삶과철학을본받으려는많은사람들이용담정사를찾고있다.(사진은지난해부산본부임원진이용담정사를찾아참배 하고관계자로부터설명을듣고있다.) 생애에대한고찰 사우관계(師友關係) 학문사상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