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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4월30일 일요일 4 (제124호) 관향조 종친회 고려좌정승 문정공 박춘 선생을 비롯 한 아들 좌찬성공(휘 인지), 손자 군수공 (휘 정손), 내금위장공(휘 형손)의 시향 이 지난 16일(음3.20) 단소가 있는 광주 광역시 북구 화암동에서 춘호 前 일성왕 릉 참봉의 집례로 40여분에 걸쳐 엄숙 봉 행됐다. 제례는 전국에서 아침 일찍부터 찾아 온 후손들로 가득하여 무등산을 찾은 상 춘객들의 시선이 모아졌으며, 낭랑하게 울려퍼진 독축 소리는 잊혀져간 전통문 화를 체험하려는 듯 길손의 발길을 멈추 기도하였다. 좌상공의 초휘는 춘(春)으로 왕명으로 개휘는 춘(椿)으로 밀성대군의 14세손으 로 14세에 이재(彛齊)백이정(白 視正,12 47년~1323년) 선생에게서 강학(講學)하 여 문장과 무예를 익히어 후에 원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시고 한림학사(翰 林學士)가 되어 익재 이제현(益齊 李齊 賢)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더불어 정주 (程朱)의 학설(學說)을 강론(講論)하고, 익재 선생의 천거로 고려조에 출사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됐고 공민왕 3年 (1354년 甲午) 2월 밀직사사(密直司事 - 從二品)에 오르고 8年(1359년 己亥) 11 월에 도병마사가 되어 수차례에 걸쳐 홍 건적의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1361년 (공민왕 10년)왕이 복주로피난 할때 호 종하여 호종공신이 되는 등 공민왕조의 충신이다. 특히 나주목사시절 정지장군 의 총명함을 익히 알고 사위를 삼은 것은 유명하다. 우시중으로 신돈의 횡포를 보다 못해 수차례 죽일 것을 간청하는 상소를 올리 는 등 직언을 서슴치 않아 신돈의 모함으 로 유배를 가던 중 신돈의 부하에 의해 살 해되어 광양 앞바다에 수장되어 뒤늦게 이 사 실 을 안 공 민 왕 이 크 게 슬 퍼 하 며 좌 시중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아들 찬성공 휘 인지는 태종조에 문과 장원하여 나주목사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손자 정손은 등제하여 고 창현감, 낙안군수, 예산군수를 역임하였 으며,손자형손은무과에올라현감과 내 금위장을지냈다. 그리고 증손 의재공 휘 번은 문과로 통 훈대부 고산현감 겸 전주진영 병마절제 도위를 지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증직되었 다. 한편 좌상공 제단 의 초헌관으로 헌작 한 병익 현종은 지난해 12월 22일자로 포 항세무서장으로 취임 이날 고유를 함께 하였다. 병익 초헌관은 타고난 효자로도 자자 해 지 난 달 본 보 창 간 1 0 주 년 을 맞 아 대 한 민국 박씨지도자 대상 효행부문을 수상 하였으며, 종헌관 진현은 본보 상섭 편집 국장의 장남으로 전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18일 첫 출 근을앞두고선조님께알렸다. 한편 좌상공의 증손 이재공과 장암공 의 묘소가 얼마 전 멧돼지의 습격으로 봉 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상섭, 행순, 일호, 진규 현종이 봉분 보수를 마쳐 화석 대종 회장은 이들을 치하하고, 종중 일에 적극 적으로함께동참해줄것을당부했다. 서석단 시향 제관은 다음과 같다.(초· 아·종·축관집례순) △ 본단(좌상공) 병익, 재양, 진현, 두 식,춘호.△동단(휘 인지)행순,영진,상 옥,정규.△동연(휘 정손)승현,두석,연 규,흥기.△서단(휘 형손)정식,영근,해 준, 진규. △의재공(휘 번) 묘소 행순, 병 도,해준,상섭,진규.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 밀성박씨좌상공파서석단(瑞石壇)시향 봉행 좌상공비롯아들손자,증손등5位븣주변묘역멧돼지습격으로봉분훼손심 각 서석단 제향제관(사진앞줄오른쪽부터진현,재양,병익,춘호,두식,화석대종회장,순정,영배,행순순) 진행중인족보수단5월말접수마감 임진왜란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 현 감을 대신하여 장졸들을 모아 위기를 극 복하고 진주성전투에 참여하여 순절한 박몽열장군을 추모하기위한 숭모제향이 지난 7일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충북 영 동군 심천면 약목리 충열사(忠烈祠)에서 지역유림주관으로 난계국악단의 장엄한 제례악과 허재순 집례관의 창홀에 따라 박세복 군수가 초헌관으로, 조동섭 영동 교육지원청 교육장이 아헌관, 박희조(박 몽열 장군 직계손)현종이 종헌관으로 헌 작하고, 안병찬 황간향교 전교가 제문을 지어 봉헌하는 등 호국 정신을 기리고 군 민의안녕을기원했다. 제례에 앞서 박래식 복야공파 대종회 장은 장군의 훌륭한 업적에 비해 사당을 마련하지 못함에 항상 송구스러웠으나 지역유림의 발의로 지난해 사당을 지어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숭모제향을 올 리게 되어 무척 기쁘고 이제야 도리를 다 한 줄 알 았 는 데 갑 자 기 지 역 신 문 에 서 터 무니 없는 황당한 기사로 장군과 후손들 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현혹되지 말 것 을 당부하고 장군의 생애를 간략하게 설 명하였다. 박몽열 장군은 1555년 영동 심천 초강 에서 태어났으며 숙부인 읍청 박사종 문 하에서 삼종(三從)형제들과 함께 소년시 절부터공부하였다. 임진년 늦은 나인인 38세에 무과에 급 제하고 황간현의 별시위 수문장이 되었 다 . 수 문 장 이 된 지 얼 마 되 지 않 아 곧 바 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임진왜란이 발생 하자 왜적뿐 아니라 도처에서 도적 때까 지 들끓었다. 왜적들이 金山(현 김천)을 거쳐 북상하며 도륙을 하고 도적들이 황 간에 나타나자 당시 황간현감은 줄행랑 을 쳤다. 처음 황간현감이 도망을 칠 때 황간에 쳐들어 온 자들은 왜적이 아니라 수십 명의 도적 때였다. 박몽열이 도적을 륍아 사로잡은 도적이 18명이었다. 황간 현감이 도망을 치자 당시 수문장이던 박 몽열이 도적들을 진압하고 임시 황간현 감을맡았다. 임시 황간현감직(權知)을 맡은 박몽 열은 황간의병장 박이룡과 함께 괘방령 에서 민관군을 이끌고 왜적과 맞서 싸우 던 중 적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하여 강가 로 탐색을 갔다가 왜적에게 급습을 당하 고 포로가 되었으나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와 전열을 정비하여 영동현감으로 부 임한 영동의병장 한명윤과 함께 지례령 괘방령에서 김산(김천)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길목을 차단하고 맞서 싸워 승전 하였다. 지례령 전투 승전 소식을 들은 조정에 서 인하여 임시 황간현감이었던 박몽열 에게 황간현감 관직을 제수하였다. 박몽 열은 곧 황간현감 겸 우장수가 되어 민관 군 의병들을 이끌고 11월부터 다시 지례 령 죽령 등에서 북상하는 왜적의 좌우 길 목을차단하고왜적을격퇴시켰다. 1593년 진주성 2차전투에 박몽열은 왜 군과 맞서 혈전을 벌였지만 끝없이 달려 드는 수만의 왜군 을 대항하기에 역부족 이었으며 결국은 진주성이 함락되기 2틀 전인 6월27일 촉석루에서 총탄을 맞고 순 국하였다. 이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선조 40권, 26년(1593년) 7월 16일(무진) 4번 째기사『황해 방어사 이시언이 정로위 인 발의 말로 진주성 함락을 보고하다』에 자 세히 전해지고 있어 영동지역시문의 기 사는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며 문중에서 는전한다. 부인 문화유씨는 장군이 황간 전투에 서 사로잡혔다는 기별을 듣고 8세된 영 백(英伯)5세 남백(南伯)두 아들을 친정 동생에게 맡기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 을 함으로서 남편(男便)을 따라 순사(殉 死)하였다. 1881년 11월 가선대부 병조참판겸동지 의금부사 훈련원도정의 증직교지 및 충 신정려와 부인 문화유씨에 대해 열부 정 려가내려졌다. /박세열명예기자(충북영동군지부) 임란의병장박몽열장군숭모제(崇慕祭 )봉행 황간현감으로진주성전투에서순절븣지역유임,후손, 인근심천중학교학생등150여명 참례하여충절기려 제향에 참례한 제관이 한자리에 모였다.(사진 앞줄 박래식 대종회장, 박철기 축관, 박희조 종헌관, 박 세복 초헌관,조동섭 아헌관,정정균알자,허재순집례) 제향에서축관이독축하고있다. 광서7년(1881년)11월박몽열장군에게내려진교 지 밀성박씨 전국청년회(회장 순구) 임원간담회가 지난 8일 오 후5시 경남 창녕읍 창녕추어탕(대표 박원주)에서 임원 30여명 이참석한가운데있었다. 이날 간담회는 지난달 12일 박순구 회장 취임 후 갖는 상견례 형식으로 참석자들의 덕담과 청년회 발전에 대한 토론을 벌인 가운데 순구 회장은 지난 취임식 때 성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 사드린다고 말하고 임기동안 자주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돈독한 정을 쌓는 가운데 더불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겠 다고 하였으며, 종식 고문은 자주 만나야 정이 드는 것으로 우 리 청년회는 그동안 많은 만남 속에 지금에 이르렀다며 순구 회 장의 뜻을 지지하고,각 지역에서 유능한 청년들의 영입을 적극 추진해야할것이라고말했다. 이어 재한 고문과 부돌 직전회장은 회장을 중심으로 각 담담 부회장이최선을다해중흥의원년으로삼아줄것을당부했다. 한편 이날 회의에서는 매년 연례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선조 유적지 탐방행사를 금년에는 5월 27일 토요일, 정국군파 학장 문중과월성박씨현감공문중을찾아가기로 하였다. 2003년부터 실시해온 청년회 선조유적탐방행사는 매년 7월 초에 실시하였으나 장마철과 겹쳐 이번에는 일정을 조금 앞당 겼으며,이번행사는여성회와함께한다. 밀성박씨전국청년회임원간담회 뱚선조유적지순례5월27일예정 뱚부산지역 박순구회장이 인사말을하고있다. 밀양박씨 복야공파 번형회(회장 세열)는 지난 13일 목요일 전남 순천의 숭성전을 찾아 참배하고 박동규 회장으로부터 숭 성전의 연혁과 운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 자며뜻을함께했다. 최근 각 종중마다 제향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참여하는 성손 들이 줄어들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격고 있다.숭성전의 경우 얼 마 전까지만 해도 음력 4월 1일,10월 1일 춘추로 향사를 봉행하 였으나최근춘향(春享)만올리고있다. 숭성전은 호남지방에 거주한 많은 후손들이 경주 숭덕전까지 참배하러 가는 것이 원거리이고 더구나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쉽지 않아 호남에서도 산수가 아름답고 소강남으로 칭하는 순 천 란봉(鸞鳳)산 기슭(전남 순천시 조곡동 297-1)에 1930년 지 역 성손들의 헌성으로 창건하여 1953년 현 위치로 이건하여 지 금이이르고있다. 오직 숭조의 일념으로 거리상 이동하지 못하는 애틋한 심정 을 숭성전 건립으로 대신한 선조들의 바램을 후손들이 이어갈 수 있도록 많은 성손의 참여와 협조를 박동규 회장은 인사말에 덧붙였다. 복야공파 번영회는 대종회 산하 문림랑공파, 국당공파, 이요 당공파, 난계공파의 후손들이 고루 참여하여 선조님의 유지를 돌아보며 제례 등 전통문화를 수호하기 위해 매년 전국의 유적 지를 순례하고 있어 복야공파 대종회 운영의 밑거름이 되고 있 다. 한편 이날 행사는 회원 40여명이 참여하 여 관광버스를 이용 이른 아침 영동을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해 숭성전과 순천만,낙 안읍성을 돌아보며 회원간 친목을 다지며 복야공파 대종회 주 관행사에 적극 힘을 보태 발전을 이루자는 다짐을 함께하였으 며, 세열 회장은 이동하는 버스에서 인사말을 통해 유적지탐방 은 우리 모임의 사업과 목적달성을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며 타 문중의 제례문화 등 운영방식을 알아보는 것도 우리 문중발전 에 크 게 도 움 이 된 다 고 말 했 다 . /박세열명예기자(충북영동군지부) 복야공파번영회순천숭성전참배 뱚순천만·낙안읍성돌아보며 뱚옛 문 화 탐 방과 친 목 다 져 숭성전참배를마치고회덕문앞에서기념촬영을하고있다(사진앞줄오른 쪽에서세번째세열회장) 임진왜란에 김해성전투 등 7년의 전쟁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임란공신 무숙공 박진영 장군 부조묘 제향이 지난 9일 오전 11시 경남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청금재 내 사당 (祠堂)에서 경주(慶柱)집례의 창홀에 따라 홍곤(洪坤)종손의 초헌례와밀직부사공 후손으로 청도에 거주하는 종후(鍾厚)성 균관 부관장,성표(性杓)현종 순으로 각각 아헌과 종헌으로 헌 작하고성현(性炫)축관의독축으로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례는 오전 9시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선영의 묘소 참배와 권곤 대종회 간사로부터 묘역 성역화 사업 설명회 를가졌다. 용화산 선영은 1682년 조성되었으며, 무숙공을 비롯한 아버 지 동천공 등 이하 선조님의 묘소가 있으며, 2013년부터 문중 자금 5천여만원을 투입 동천공의 묘소를 산청에서 이장하여 묘 비와 건립하하는 등 10여기의 묘소 이장, 간벌 사업을 시행하 고, 2017년 3월 현재 2천2백만원이 조성되었고, 2017년 10월까 지 후손들의 성의를 모아 선영 성역화 표지석을 건립할 예정이 다. 무숙공은 임진왜란의 백의로 창의한 동천공(휘 오)의 아들이 다.1594년 무과에 급제하고 권율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는 등선 무원종 2등 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1599년 용궁현감으로 출사 하여 조선의 서북방을 방어하는 무장으로 활동하였다. 1624년 평산도호부사겸 황해도 방어사 재임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아 들 유룡, 임룡과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삼부자(三父子)가 진무원종1등공신으로책록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강학(講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고, 1626 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636년 병자호 란에 69의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향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 으로 향하던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馬)에서 떨어져 비분통곡하고 귀환하여 1641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1644년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1649년 숭정 대부 판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증직되고, 1871년 무 숙(武肅)의 시호가 내려지고 국불천위를 하사하였다. 이때에 7 세손 만성공(휘 치복)이 선조의 유고를 모아 광서실기를 편찬 하였으며,1880년 삼황대보단(三皇大報壇)에배향케하였다. 그리고 근세의 후손들은 선조의 훌륭한 유훈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선조의 유품 도록을 만들고, 학술발표회를 열어 ‘무숙공 박진영 그 애국의 삶을 조명하다’을 출판하는 등 다각 도로 현창사업에 매진하고, 이날 제향에도 한국학진흥원의 후 원을 받아 종가의 문화를 국가기록물로 보존하기 위해 경북대 학교 영남문화원에서 나와 동영상 촬영 등 취재를 하였으며,행 사후에는유물전시관을개방하여선조의유훈을되새기는시간 을가졌다. 임란의병장무숙공박진영장군376주기부조묘 제향봉행 경북대학교영남문화원취재븣한국학중앙연구원지원,국가기록물보존 제례에 참여한 제관이 한자리에 모였다.(사진 앞줄 왼쪽부터 초헌관 홍곤, 아헌관 종후,종헌관 성표,집례경주,축관 성현순) 용화산선영의무숙공묘역. 밀양박씨 찬성공 후 용수종회(회장 성경)가 새로이 임원진을 구성하고 신라 왕손의 후예로써 새로운 출발점을 찾기 위해 경 주 오릉을 비롯한 신라 10왕릉을 찾아 참배하고 우리선조의 위 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를 가지고 화합하고 단합되 어 일가친척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 면서새로운도약의계기로삼았다. 성경 회장은 이제 우리 종중원은 우리의 뿌리를 알고 선조님 의 음덕에 보은하는 후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종원간 친목을 다지는 행사를 자주 가질 것이라고 말하고 더 발전하는 종중을 만들기위해함께노력하자고말했다. 밀양박씨찬성공파용수종회선조유적지탐방및단합 대회가져 경애왕릉을찾아참배후기념촬영을하고있다. 신라10왕릉참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