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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장수 생가지 : 내일동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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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3일 경남 밀양군 밀양 장날에 윤소룡(尹小龍)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밀양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이장수 등은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세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에 이장수 등 중심 인물들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밀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부산으로부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0년 10월 고인덕(高仁德)·최수봉(崔壽鳳)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뒤 1920년 12월 최수봉이 추진하던 밀양경찰서 폭파의거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