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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월 14일 냐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서도 집에있는 노약자들을 마을 앞 논으로 집결시킨 후 전원을 학살하였고 기타 지역에서도 학설· 하였다. 함평λ}건은 1950년 12월6일부터 1951년 1월 14일 사이인 30일간에 발생한 사건이며 , 11사단장 崔德新의 “堅뿔淸野”작전을 성실히 수행한 결과의 산물이 소위 ‘함평양민학살’이라 불려는- 사건아 발생하였다. 2. 누가 함평사건(양민학살을 의미)은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을 맡은 국군 제 1 1 사딘- 제 20연대 제2대대 제 5중대의 군인들이 중대장의 지시에 의하여 저지른 학살사건으로 국방부에서 빌-긴-한 관련자료에 의하띤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3. 왜 0 11사단장 : 崔德、新 준장 o 2대대장 : 柳며烈 소령 o 20연대장 : 木|、其內 대령 o 5중대장 : 權俊玉 대위 학살이 있은 후 당시 주민들 사이에 잔해진 이야기로는 1950년 1 2월2 일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해 있던 5중대 군인들이 장성으로 가는 길을 확보카 위해 가던중 한새들(현 계 럼러 시목 마을앞 계럼천내 지하보 부근)에서 시 목마윤 뒷산에 진을 치 고있는 공비 들과 하루동안 전투를 하였고 그 결과 5중대 군인 2명 이 (경북 영천출신 김추길. 송기봉) 전 사하였피 당일 전사자를 후송치 못하고 디-음-날 전사자플- 후송키 위해 잔투지역 에 갔을 때 전사군인의 신과옷을 다 벗겨갔고 시신을 무자비 하게 난도한 것을 본 5중대장 權俊土이 부하들애게 ‘철저히 복수하겠 다’고 다짐을 한 것 이 학살의 계기가 됐다고 당시 함께 전투에 참여 한 양영언(현재 제주도 거주)의 증언이 01 룹 증명하고 있다. 4. 피해 결과(제4대국회의 “양민학살진상조사 특별위원회”조사) 국회 저135회 임 시회 제 19차 본회의 (60.5.23)에서 팍회차원의 진상을 조사해야한다는 함평출신 ‘김의택’ 드;;-회의원의 청원애 의히-여 특위가 - 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