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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6월20일 토요일 저12970호 (3댐) 주‘식’회사 라인문화 광주광역시 냥구서동 l1í ξI펠 펙률훌 훌r 3I =.~._ , __ :: [ 신문 보도자료 1949년-2010년] 4 찾 4. 1998년 6월20일 토요일 흙반훌흙훌합훌함훌 훌 훌. - - ‘ 1 ’ ‘ , j ‘ 필자는지난 73-74년 2년동안건 국 직후의 여순(麗I1頂)반란사건 (국 군 14연대 반란사건)에서부터 6. 25공비토벌에 이르기까지 광주 · 전남지역에서 발생했던 동족상잔 의 비극을취재, 신문에 연재한바 있다. 좌 -우익으로 갈라진 첨예 한대립과갈등속에습격·체포· 학살의 악순환은 우리 겨레의 현대 사에서 동족끼리 벌인 처참한 ‘광 란의 살육’ 바로 그것이라고 밖에 달러 표현할길이 없었다. 6.25당시 전남지역에서는 콕성 ‘빨갱이’로 늑엔찍혀 희생당하는 일이다반사였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국군에 의 해 저질러진 것으로 알려진 합평 양민학살 사건이다. 지금까지 알 려진 이 사건의 진상을 50년 음력 10월27일과 28일 이틀동안 국군이 빨치산을 색출한다는 명분이래 당 시 전투지역내에 있었던 월야 · 해 보 · 나산면 등 3개면 양민 5백24 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1천4백54호 의가옥을불태웠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15- 45 딛 • E • 으I.Ot~ 1t1 . 0 D 모 양민사건이면서도 이 사건은 한 때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극은 계속된 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주민듣허l 게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신원조회 때는 어김없이 ’ ‘빨갱이 ’ 꼬리표가 따라 나왔으나 밀h이다. 비로소 4 . 19직후인 60년 5 월23 일 구성된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 상특위가 거창 등지와 함께 현치 조사한 결과 피해사실을 혹변하고 국군의 행위임이 흑앤됐으나 이듬 ,~합i평 양민학잘’ 50여 년 痛t봅 태안사 전투를 제외하고는 큰 교 전은 없었으나 적치 (隨治) 3개월 동안 수많은 우익진영이 ‘브나롤’이 런 이름으로 희생딩했고. 9.28수 복으로 10월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피비린내나는 만행을 저지르고 물 러깃k다 그후우리 국군이 진주해 서는 조}찍진영, 이른바 ‘빨갱이’ 들에 대한 보복 또한 참극이었다. 공비토벌이 진행 중에는 지리산 을 비롯한 전남 도처의 산간지역 에셔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뺀공화국이라 할 정도로 밀고 당기는 ‘톱질 전투’가 숨가쁘게 전개됐다. 이로 인해 산간마을 양 민들은 밤에는 빨치산들에게 ‘반 동’으로몰려 죽어갔고, 낮에는 곡군에 의해 빨치산과 내통하는 세까지의 남자를 마을 앞 산으로 모이게 한 후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했는가 하면 마을을 포위한 후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물어 내 총으로 난사했다는 것이다. 학 살당한 어머니 등에서 죽어간 어 린 아이, 한 가족 7명이 몰살당하 고 대가 끊겼다는 등 학살의 0뻐 규흔띈 지금도,생생히 ‘합평천지’ 를떠돌고있다. 희생자 유족들은 국군이 학살 전 날, 해보면 문죠반 소재 국군5사단 없연대 5중대 중대본부가 빨치산들 의 기습을 벌二l아 많은 전사자가 발 생하자 빨치산과 주민들이 내통해 기습을 당했다고 핀단해 이같은 일 을 벌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 창양민학살사건에 버금가는 대규 해 5 . 16쿠데타가 발생해 후속조 치가 이뤄지지 않~다. 지난 93년 1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 됐지만합평사건은적용되지 않아 억울하게 죽은 원흔들은 아직 구 천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 생자 유족들의 청원에 따라 국민회의가 이 사건의 진상조사 를 실시키로 했다니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제 와서 당시의 만행자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나 다. 철저한진상조사를통해 억울 하게 숨진 피해자의 명예회복조 치가 이뤄지고 유족들을 위로하 는 동시에 국가에서 조그마한 우l 텅탑이라도 세워주는 것이 도리 라고 생각한다/논설위원 。 。 ζ 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