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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나는 屬體 더미서 살아 나왔다 - 威平볕殺事件 樓柱者의 말 - 機關統으로 마구 전남합평지역 79 뼈에 사무친 『第五中隊」 의 蠻行 갓난애는 밟아 죽이고 냐는 死體 더미서 살아 나왔다 - 서가 1앉b년 5월 21 일(토요일).한국일보 7단기획기사 - 속보 : 1천 여명의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였다는 전남 함평(廣平)군하-월야면 (月也面)과 해보면(海保面)에서의 만행진상이 현지를 찾은 기자들에 의해 상세히 드러났다. 이 고장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의 『제5중대』란 말만 들어도 몸서 리를 치면서 10년전의 r슬픈 사설』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월 야 면> 『대한민국만세』중에 맞아 쓰러지는 전직호국군인 정(鄭)씨의 훨사적인 힘의 외침이었으나 이놈의 자식이라는 욕설과 함께 또다시 퍼부은 총탄에 r정』 씨의 맥박을 잃게 했다는 이야기는 83년 음력 10월29일 함형군 내에서 제일 먼저인 월 야면(月也面)325명 집단학살사건의 무자비한 주둔군인들의 만행을 대변하는 것 같다. 『정』씨는 『살려면 집에서 나와 뒷산에 모이라」 하는 제5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장 권(權俊玉)대위의 추상같은 호령에 죄없는 우리들은 설마하고 따라 나선 밍0부락민들 속의 한사람으로 부락에서 200 rpl 터」 지점얀 뒷산형장에서 모든 증명올 제시-호국 군인이었음올 주장했으나 군인들은 이를 본체만체 방아쇠를 잡아당겨 쓰러뜨리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는 r정」 씨에게 또다시 총탄세례를 퍼부어 죽였을뿐더러 6.25때 후퇴하여 집에 없는 남펀이 동부락에서 3 r키로」 지 점인 불갑산(佛甲山=해발1천5백미터)에 입산했다고 경찰야었던 노(盧興用)씨의 부인을 총살했다는 것이다. 부락민들은 이 학살에 앞서 동월 28일밤 동면에서 공비와 교전중인 2명의 군 안이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알고있으나, 학살당사 부역자와 공비는 이미 불갑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려 참변을 당한 자 중에는 부역자가 한사람도 없 었고 죄가 없기 때문에 남아있었던 양민들이었다는 것이다. 5중대사병 한사람과 친해졌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월야리 (月也里)의 김(金容擇=45)씨의 말에 의하면 5중대는 하루에 공비 300명과 건물 50동올 사살 또는 소각시키는 전파를 올리라고 상부에서 명령올 받았기 때문에 부락펀을 학살하고 집을 불살라 아를 전파로 상부에 보고했고 밭에서 일하다 끌 려왔던 농민들올 죽야고 그 손에 쥐어진 농구(農具)들을 사살한 공바에재 얻은 - 5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