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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전남합형지역 71 중대본부가 있는 해보면 문장에서 장성군 삼서로 가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 여 가다가 월야면 정산리 장교와 동촌마을 입구에서 공비의 습격을 받아 국군 3 명이 피해를 다했고 야간에는 공비들이” 승전축하잔치” 를 하며 인근마을 주민 을 강제로 모아놓고 봉화불을 피우고 징과 황과리를 치며 국군을 조롱하자 이에 격분한 20연대 5중대 군인들이 익일인 1950년 12월 6일(陰;10.270 장교와 동촌마 을 주민들을 마을앞 논으로 모이게 한 후 양민 70영을 학살하였다. (증인:당시 16 세로 현재 동촌마을 거주 곽상일) . 해발 1없m의 월악산 자락에 옹기종기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도 통년 12월 7일(陰:10.28) 5중대장의 인솔하에 5중대 병력이 7개부락(지변,내동,동산,순촌,송계, 괴정,성주)양민 700여명을 ” 도로공사 하러가니 나이에 관계없이 모이도록” 하고 15세 미만의 아이들은 마을로 가서 가옥에 불을 지르도록 지시하였고,15세부터 45세 사이의 주민을 별도로 분리하여 세운다음 총으로 사살하였다. 죽지 아니한 자를 찾아내 사살하기 위하여 ”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은 불을 끄러가라” 고 하여 일어선자는 사살하고 또 외치고 일어서면 사살하가를 3번이나하였고 아무 도 일어나지 아니한자 확인 사살까지하여 200여명을 학살하였다. {증인 :5중대장 연락병이 살려준 당시 학생신분인 정일웅 현장에서 살아난 양채문과 정남숙,5중 대장 연락병으로 현장에 있었던 제주도에 거주하는 김일호 선무공작대원 겸 동 삼면 파견대장으로 현장에 계셨던 前 국회의원(7-10대까지)인 윤인식, 당시 월 야지서장 이계필, 당시 월야 지서 순경 오정얀,마을 주민} 또 다음날인 12월 9일은 윌야면 와치리 외치부락 주민이 공비와 짜고 야간에 광주 영광간 도로를 굴착하여 軍작전차량 통행을 방해하고 있으니 동조자를 색 출한다는 이유로 주민을 모이게 한후에 22명을 뽑아셔 현장에서 1명올 사살하여 도 동조자가 색출되지 아나하자 월야초둥하교 뒤와 해보 금덕리 두라생 언덕에 서 17명을 사살한바 있다(증인:전 월야연장 정기정 당시부면장으로 외치거주 정 복만) . 1950년 12월31 일(陰:11.23)해보면 대창리 쌍구령과 1951년 1월 12일(陰:50.12.5) 해보면 상곡리 모명마을에서는 5중대 군인들이 마을올 藏開하며 소재지로 피난 을 가는 주민을 무조건 총으로 사살하여 70여명을 학살하였다(증인:현재 광암리 거주 박용원? 모평거주 윤석현 생존자 윤경중 주민들) 또한 인근에 있는 나산면 우치리의 경우도 같은 이유로 50여명이 희생되었다(증인:우치리 이계준,주민들) 口 훌함者 名훌回複 推進 • 國會의 努力 o 4대 국회에서 「양민화살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 일 시 ; 단기4293년(서기 1960년) 5월 23일 획 기 : 국회제 35회 임시회 제 19차 븐회의 - 위원장 ; 崔 天 國會議負 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