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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천진난만하다 못해 차라리 바보스러웠던 양민들을 「피난」 이라는 말로 꾀어 2백여명 이상 학살해 버린 것이다. 이로 써 成平군 9개마을의 양민 5백여명의 학살극은 막을 내렸다. 길가 산속에서 한 두명씩 학살당한 것을 제외한 집단학살 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당시는 전쟁중아었지만 군작전지시가 얼마나 얼토당토 않았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당시 까l서장을 지낸 李모 ~ ----~← - 씨는 증언했다. 벌그년1월7---8일께였다. 1 . 4후퇴가 시작된지 3--4일후였다. ‘ - ‘ ,.,..,. -- 月也면 三、짧리 마을 뒷동산에서 「군경합동작전회의」가 열렸 李씨는 증언했다 rr威平양민학살이 공비학살로 보고되고 팽 아 삽등 농구가 노획무기로 보고된 것 같다』고 했다. 당시 경찰들은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농구를 줍고 집에 불을 지르 며 사람들을 나오라고 외쳐대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무지한 발상에서 나온 작전으로 인해 더 많은 양민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후 5중대는 51년2월20일(음력 정월대보름) 해발5백 15m 의 험악한 산세의 「佛甲山공비 대토벌작전」에 투입, 「대보름 작전」을 전사단병력과 함께 펼쳤다. __ . ---;---;--- 당시 佛甲山엔 수천에서 수만명의 공비가 은신해 있었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공비 西南지구사령부가 설 치되어 있던점으로 마루어 최소한 1만명이상이 들어가 있지 않았나 추측되고 있다. 이곳에는 억지로 부역을 했거나 주위사람들의 시기로 인해 ‘ .;íi …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