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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따平양민학삽사건 자신들이 태어나 이때까지 살아온 고향마을에서 5중대에 의 해 무참히 살육당한 것이다. 『한마다로 어처구나가 없었습니다. 그놈들은 공비나 좌익 분자들은 모두 도망가게 두고 항거할 수 없는 힘없는 노약 자들만 끌어내 공비로 몰아 처형했습나다.J]라며 어머니의 기 지로 살아남은 郭상일씨는 그날의 학살 순간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東村마을을 초토화시킨 5중대의 한 장교는 마을사람들에 게 명령했다[í지금부터 月也면 소재지가 있는 文場리로 소 개(피난)하라. 남아 있는 자는 공비로 간주하고 하나도 남김 없이 사살하겠다.J]라는 말을 남긴 채 상오9시께나 되어 철수 해 벼렸다. 집은 모두 불타고 먹을 양식마저 떨어진 그들은 이곳저곳 친척집을 전전하며 끼나를 해결 해야했다. 「토별군 5중대」 중대장 權준옥 대위. 그는 이곳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백정」으로 불리워지고 았다. 東村마을을 쓸어버린 5중대는 다음날인 12월6일 다시 月也면 月돕라 I천 洞 池邊 )1價村 松漢 東山 f鬼흉 6개마을 양민 1백 50여병을 학 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지역은 南山뢰를 중심으로 6개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2백 10여 가구가 살았던 아주 큰마을이 었다. 南LÎJ퍼 학살현장에서 양계장을 하고 았는 李채춘(53 ~ 月 也랴 2구81 당사 12서1)의 증언이다 11아침밥을 먹기 전이었습 니다. 먼동이 뿌떻게 틀무렵인데 그날은 안개가 짙게 깔려 옆사람 얼굴마저 구분하지가 힘들었습니다.J] 유가족과 주민들은 이 안개가 짙게 끼인 것은 죄없는 사 람을 많아 살리려는 하늘의 조화였다고 지금도 굳제 받고 - 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