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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보도자료 1990년-2001 년] 앞 논바닥에 내동탱이쳐진 30여명의 노약자들은 불칸한 눈 망울을 굴랴며 논둑바로 위에 올라서 있는 한 장교의 업을 쳐다보고 있었다. 겨설찮£사자 1945년8월 15일 해방의 가쁨과 함께 찾아온 아념과 사상의 극한 대립. 도사지역은 극右 농촌지역은 극左가 판을 치고 았었다. 숲南威平군 月也면 亨山리 東村-마을도 예외는 아니 였다. 당사는 치안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하던 때였 다. 우익에 몸담았던 郭상태씨 가족들은 아버지 郭석연씨와 어머니를 고향에 둔 채 폼을 피해 객지로 떠돌아 다녔다. 郭 씨의 형은 6 . 25전란이 나가 바로직전 군에 입대해 휴가 한 변 나와보지도 못한 채 전사했다. 논바닥에 끌려나간 30여명의 노약자들은 한결같이 죄없는 불쌍한 양민아란 뜻이다. 논둑위에 하늘처럼 우뚝 서 있던 장교는 훌쩍 길가로 뛰어내렸다. 그때였다. 주위에 늘어 서 았던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도망갈 곳도 엎드릴 곳도 값였다. 그차리 쉐 푹 푹 꼬꾸라줬다. 아욱고 총소려가 맺었을 때 양민들아 압고 있던 하얀 명 주적삼은 피에 흥건히 젖었고 논바닥 또한 선혈이 낭자했다. 이로써 東村마을 양민학살은 60여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채 끝이 났다. 그들은 1950년12월6일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 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