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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걷는다. 당시 이 항쟁은 이승만 일파의 잔혹한 토벌조치로 8만여 제주도민 이 학살당한 채 막을 내렸다. 제주도에서의 학살은 좌·우익간에 보복의 형 태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그 결과 군에 입대했다가 토벌이 끝난 후 고 향에 돌아간 사람들은 4.3과정에서 자신의 부모·형제가 희생된 것을 알고 군에 다시 복귀, 각지에서 보복학살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였다눈 것이다. 함평에 주둔한 토별대 5중대에도 제주도 출선 벽사가 많았고, 그들은 춘 민들에게 이와 같은 자신들의 억울한 고향사정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말하는’ 또다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ED년 12월 5일 5중대 병 력이 해보면 금덕리에 주둔하고 있다가 장성군 삼계면 본부로 연결되는 도 로를 따라 순찰하던 중이었다. 이들이 윌야면 정산리 동촌부락 언저리에 이 르렀을 때 인근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총격을 가해 ,3명의 군안0] ~} 망한 일이 있었다. 이어서 그날 밤 불갑산 자락에 있는 야산 곳곳에서 빨치 산들이 승전을 자축하는 봉화불을 올렸고, 5중대는 이 때문에 약이 올라 인 근 자연부락을 전부 초토화시켜 보복했다는 것이다. 즉, 5중대가 총격을 받은 장소인 동촌 인근부락을 바로 그 다음날인 12월 6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고, 봉화붙이 올랐던 산악 근처의 6개 마을은 또 그 다음날 습격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현재 월야면장으로 있는 김재병 (57)써의 증언은 당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띤때 5중대 뽑가 장성군 삼계면 λ 뺑 l 있었어촌 여Zl 함평군 문빡 파견대가 있었고요 음력으로 1950년 10월말이나 11월초쯤 됐을거요 문장 에 있던 파견대로 순찰오던 병력이 동촌 부근에서 유격대에 피습당했어요 그러니까 다음날 윌야중학교 부근 들판에서 대대적인 작전이 벌어접디다. 그 군인들이 어떻게 이 근방 지려를 잘 알았겠어요 유격대들이야 이 바닥 사람들이 많으니까 손바닥 보듯 환했겠지요 그만 군인들아 당하고 말았지 요 그날 전투가 유격대로서는 커다란 승리였나보더군요 윌악라 6개 부락 을 합쳐 ‘다래기’라고 부르는데 그날 밤 다래기 주위 산봉우리에서 봉화불 야 올랐어요 유격대가 올린 것이지요 그 광경이 문장 쪽에서 환히 내다보 함평 157 - 4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