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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들한테 끼여 있음시롱 워찌나 무서운지 동서랑 손을 꼭 잡고 있었어요. 뜬 금없이 총을 막 쏘아탱깨 동서랑 나는 보듬고 막 땅에 궁글었어요 그라다 어깨죽지에 총을 맞아부렀어요. 동서는 가슴팍에 맞어 그대로 즉사해부렀 고요 군인들이 총을 안 맞은 사람 일어나라고 해씻는디 나는 숨도 안 쉬고 그대로 있다가 살아나왔지라" 이때 희생당한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주민들은 공포에 휩 싸여 어느 누구도 공식적인 조사를 하지 못했으며 또한 다른 부락 사람들 이나 방아 쩡으러 온 낯 모르는 사람도 함께 희생됐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대개 3백 명 내지 3백 50망 2백 30명 등 제각각의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 때의 정황으로 보아 최소한 2백 명 이상은 되었을거라는 짐작이 될 뿐이 다. 그남이 음력으로 1앞£정잎이어서 지퓨도 해마다 음력 10월 z7일 밤이면 거의 집집마다 제사가 든다~몇-사람은 현장에서 부상만 입고 살아났다가 집으로 옮겨와 치료를 받던 중 죽기도 해서 제사날이 하루 이틀 늦은 경우 도 았다. 어쨌든 이날 남산뢰학살로 4백여 호가 념던 이 일대 마을들은 쑥대밭이 되어 이후 마을의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제주 4.3항쟁의 보복 5중대가 이 무렵 잇따라 월야면 자연부락들을 상대로 양민학살을 벌였던 데 대해 주민들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증언하고 있다. 첫째는 11사단 병력이 대부분 제주도 출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아유를 찾는다. 왜 제주도 출신 병력이 학살과 연결되는가. 그 이유는 제주 4.3항쟁으로 이어진다. 제주 4.3항쟁은 미국과 이승만세력이 냥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기도하는 것에 항거해 1없8년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열어났던 대규모 항쟁을 일 156 - 4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