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page

[단행본 보도 자료 1990년-2001 년] 2대대 5중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앞의 자료에 의하면 5중대가 함평 양민학살을 자행한 사기는 작전 제2기(1때년 10월 26일---12월 31일)에 해당 한다. Ii공비토별사』에 기록된 제2기 작전목표를 살펴보자. 제2기 작전에 있어서는 적 근접지를 교란하여 적의 보급로 차단 및 통 신망 두절 둥으로서 적으로 하여금 기아에 몰입시켜 산중에서 월동저항 을 불능케 하고, 또한 양민을 산간벽지에서 평지로 소개시켜 농작물에 대빼는 공동작엽으로 수헬~l 하는 한편 아군의 통신망과 보급로 및 기 동에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잔비소탕에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5중대가 취한 조치는 ‘양민을 산간벽지에서 평지로 소개시킨 것’ 도 아니었고 ‘농작물에 대하여는 공동작업으로 수확케 하는 것’도 아니었 다. 양민에 대해서는 학살이, 콕식에 대해서는 빙-화가 작전의 내용을 이뤘 던 것이다. 5중대의 작전행태와 관련, 당샤 월야지서장이었던 이아무개(76)씨는 이렇 게 기억을 떠올린다. “1.4후퇴가 며칠 지난 어느날입니다. 장성군과 함평군 경계지역인 장성군 삼계면 사목마을 뒷산에서 작전회의가 열렸어요 경찰로서는 오직 저 한 사 람만 참석했는데 그때 ‘하루에 무조건 공비 50명 사살, 무기 밍점 노획’을 지시하더군요 아마 이런 지시 때문에 더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작전지시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고 볼 수밖어1 얹다e 왜냐하면 아 회의가 열라가 1재월쯤 전에 함평군 월야변에서 양민을 학살 할 때에도 군인들은 부락민들을 총살시킨 후 집집마다 돌며 낫과 팽이 등 을 노획물로 챙겨갔기 때문이다. 이것들아 노획무기로 둔잡해 공로로 연결 되었을 것임은 뻔한 일이다. 당시 5중대 본부는 장성군 삼계면에 있었고 함평군 문장에 파견대가 있 었는데 부대원들의 만행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아었다고 주민들은 입을 함평 151 - 4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