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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은재를 잇는 능선에서 저항하던 무장유격대는 전세가 불리함을 느끼고 탈출했 다. 그러나불갑산특히 모악산기늙의 오두 · 운암 가정 · 광동 · 원산 · 산안마 을이나 산비탈 및 계콕엔 비무장 민간인들이 여전히 흩어져 았었다. 토별군측은 귀순을 권유했으나 민간인들은 대체로 갈 길을 잃고 이라 밀리고 저리 밀렸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사람들이 희생됐다. 이 날불갑산작전에서 희생된사람은 1천 5명이다. 이 1천 5명가운데는제5중 대가 월야 해보 · 나산면에서 학살한 양민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불갑산· 전 투에서 제5중대의 적 사잘이 1백 20명으로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제11사단은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을 끝내고 1951년 4월 6일, 동해안 전선 전 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기간(1950년 10월 4일~1951년 4월 6일) 동안 제11사단 이 호남지구에서 올린 전과는 적 사살 약 1천 9백 50명(추정) 생포 및 귀순 2천 1 백 78명’ 이라고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호남지구는 지리산 백운산 · 백아산 회문산 덕유산을비롯한호남일대에서 전개된작전지역을말한다. 지리산은물론백운산 백아-^J- 회문산등에비해월등하게작은불갑산에서 사살된 인원이 제11사단 전과의 절반을 념고 있다는 것은 불갑산에 입산했던 민 간인들이 토벌군의 공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가 희센됐음을 의미한다. 당시 군의 피해는 단 3명에 불과했다. 이는 무장유격대를 처음에는 5백 명으로 추정했다가 나중에는 3백 50명으로 낮춰 기록하고 있는데서 나타나고 있듯이, 작전상 무차별 공격이 행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무장유격대원 3백 50명 을 전원 사살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무고한 민간인 6백 55명이 불집잔에서 휘생 된 셈이다. 그러나 당시 무장 빨치산 인원이 빨치산 측 증언대로 1백 20명이고 이들 대부분이 건팎f쪽으로 빠져나가나주금성산을 거쳐 장흥 유치지구로 탈 출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천 5명의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으로 보아 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1) 3. 불갑산 일대 U빌치산 소탕전 r전투상보」 1) 김영택 r한국전쟁기 (1950년 10월"'1951 년 3월) 불갑지구 빨 치산과 ‘대보름작전’ J . r北훈史論J10집, 북약 사악회, 2003. 합평군향토문화언구회 i 165 - 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