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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羅훌.~‘μ~.;-'‘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가 되어 남쪽의 산악지대로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인공체제에 동참했던 해당지 역 좌익세력과 함께 무장유격대 즉 빨치산이 되어 대한민국 체제전복과 후방기 지 교란퉁의 작전을 수행하는 제2전선’ 을 형성하게 된다. 전자인 전쟁 전의 빨 치산을 ‘구빨지’ ,후자인 전쟁 후빨치산을 빨치산? 또는 진빨치’ 라부른다. 대한민국 정부와 군 당국은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하면서 후방지 역의 빨치산 소탱1전을맡았다. 주로호남과 지리산주변을담당했던 육군 제11사단싸단장 최덕신 준장)은 1950년 10월 3일 경남 싣탱진에서 창설된 후, 14일 남원으로 이동 하여 이곳에 사령부를 세웠다. 예하부대 중 지리산서부주변과 전북지 역을 담당 할 제13연대(연대장 유흥수 대령 최석용 대령, 1950. 10. 4~51. 3. 30)는 힘양, 지 리산 동부와 인접한 경북 및 경남지역을 담당할 제9연대(김희준 대령 · 오익경 대령, 1950.10.4-51.3.30)는 진주에 본부를 설치했다. 주로 전남과 전북 일부지 역을담당할제20연대(연대장박기병 대령, 1950. 10. 4~51. 3. 30)는굉주로 이통 해 굉주여중에 연대본부를설치했다. 저120연대는 담양 순창 회순 장성 · 나주군 일대에 출몰하던 빨치산을 소 탕했다.51년 2월 9일에는 제1대대와 제2대대를 회문산에 투입해 1천 3백 50여명 의 빨치산들을강타한후 그중제2대대를불갑산빨치산을소탕하기 위한 대보 름 작전’ 에 투입했다. ‘대보름 작전’ 은 음력 대보름인 1951년 2월 20일 새벽, 함 평군 해보 나산 신광면, 장성군 삼서 삼계면, 영암군 묘량 · 불갑면 등 7개 방변에서 불갑산을 호t해 일제히 진격하면서 시작됐다. 아-무렵 불집잔어l는 빨친산 동 좌익활동을 했거나 좌임 쪽에 가까운 사람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한국군과 경찰이 설지를 수복하면서 북상함에 따라, 총격 전에 대한 두려움과 우익인사의 감정적 보복에 대한 불안으로 일단 피신을 하고 보.7-1는 입장인 민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좌익들이 함께 산으로 가지 않 으면 가족들을 몰살하겠다는 협박에 따라 입산한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제5중 대의 양민학살사건이 잇따르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불갑산 밖에 없다며 많은사람들이 자진해서 몰려들었다. 이처럼 사상적 성향이나 행적과는 관계없이 생존을 위해 불갑산으로 들어간 162 i~쐐 앙앙군상토둔외언구외 - 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