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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로 안하여 한국 정부가추구하는통일정책은 계속유엔과 마찰을 빚기에 이르렀다. 우선 한국 정부는그통치권올꼈선 이남에 국한시킨다 는 유엔의 결의를 거부하고오히려 한국 정부가 임명한 이북 5개 도지사가 군부 대와 함께 북한수복지구에 진입하도록하였다. 이승만대통령은 10월 ';1)일에 수 복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해방과 통일 의지를 명백히 하고, 한국 정부는 북 한대표의 협력을 얻어 그 통치권을 전체 한반도에 미치도록 할 것을 바라나유엔 이 한국의 권한을 웠선 이남에 국한시키고 았는 상태엄을 밝혔다. 또한, 30일의 기자회견에서는유엔 한국중간위원회가 결의한 남북한총선거에는/반대하고한 국 국회가 북한을 위하여 유보하고 있는 100석을 채우기 위한 북한만의 선거를 주장하였다. 이는유엔군의 힘에 의존한 북한의 수복은 결코 한국 통일정책의 직 접적인 계기가 되눈 것을 어렵게 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은 1차 적으로 유엔의 전쟁 목적 아래 방해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은 잠재적인 위협세력이었던 중공군이 정식으로 개입되면서부터 전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10월 24일에 드디어 한국군 제6사단이 청천강 상류에 있는 운산에서 중공군으 로 보이는 적군에 의하여 포외되었고 이를 구원하기 위한 미 체1가병사단도 그 달 2b일에 포위당해 고전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 태에서 유엔군은 보급에 곤란을 겪었고, 미군은 청천강 남쪽까지의 후퇴를 명하 였다. 그러나한국군은북진을계속하여 11월 21일에는압록강 연안인 혜산에 이 르렀다. 유엔군사령관인 맨아더장군은 중공군의 재압을 우려하면서도 대탑한 북진정책을 취하긴 하였으나 가능한 지역의 안전을 우선하도록 유념하였다. 중 공군의 개입으로 일시 주춤하였던 연합군은 11월 24얼에는다시 압록강을향해 본격적으로 진격을 재개하였다. 이 날 맥아더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특 별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압록강 연안의 진격은 한 국군에게만 맡기고 나머지 유엔군은 국경까지는 이르지 말고 북동부지역은 청 진에서 진격을 멈추도록 제안하였으나 맥아더는 이에 불복하였다. 유엔군의 진 격이 다시 시작된 직후인 11월 25일과 26일에 중국꾼이 187R 사단에 이르는 막대 함평군향토문화연구회 1159 ' . -'~'‘“‘- 펴철違과iι - 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