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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8일 월 야면사무소에서 최 초증인 10대 국회 때 청 완. 한나라당진윈이 부 결표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활평 양명확살화·생자명예회복황얄채영 정근욱 <(사)합평사건 회생자유족회 고문)) 1 들어가며 함평양민학살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운동은 유족들이 중심이되어 꾸준 히 진행되어 왔다.60년대 초기에는 4대국회가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 를 구성하여 양민학살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조사를 하면서 함평군의 경우는 1960년 6월8일 윌야면사무소 회의실에서 당시 부면장 인 정복만(외치 학살시 동생이 학살당함) 정일웅(남산외 생존자) . 정남 식(남산외 생존자로 총을 7발 맞은자) ,정봉규(남산외 유족) , 정재식(남 산외 유족)이 증언을 한 내용이 12페이지로 증언분량이 가장 많았고 오 전 10시 20분에 증언을 마쳤다 같은 날 해보면사무소 회의실에서는 강 철현, 윤방중, 윤형중 김성묵 면장이 증언을 하였는데 증언 내용이 6 페이지다. 또 같은 날 나산면사무소 회의실에서는 이오섭 면장과 이천구 두 분이 3페이지의 분량을 증언하였다. 그런데 3개면 모두 희생자 명단을 정확 하 작성혜셔 함평출진 -국회와원원김의택의원에겨:1- 보내줄 젖올부탁하 고 증언조사를 마쳤는데 국회 의사과 문서고에서 진상조사 본회의 보고 서와 현지조사 속기록은 있으나 희생자 명단은 발견하지 못했다‘ 보고서 에 의하면 524명이 희생되고가옥1.454동이 소실된 것으로 집계됐다. (월야면 :350명,가옥1 ,450동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가옥4동) 그 뒤 14대 국회부터 17대 국회까지 희생자들의 진상조사와 명예회 복에 대한 청원서를 유족들이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14대부터 15대국회 는 회기를 념겨 버렸고 16대 국회에서는 본회의까지 상정되었으나 한 나라당 국회의원 전원이 부결표를 던지므로 유족들은 다시한번 쓰라린 136 내일을향해 달려가는합평익 모슬들 - 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