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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 r t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n~ 다ê'H:J! ~.;;!시장r{;시 ^'‘(., 뇌;:- 앙당‘ .. “ l 도 주':"등CL~ ’ 시티 슨l Bi’듀 '"딛: ~L-~: f:.: ! ’- 간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외치 사랑들은 다래지 마올과 똑같익l 매년 음력 10월 z1일날제사를지낸다. 월야·해보지역 주 민들의 제삿날이 같은 날이거나 하루 건너 재사를 지내고 있는 것도 현대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 는증거이기도하다. 시채더미에 깔려 살아난 사람도 월악리 사건이 있고 냐서 40여일 후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올에서 또 한차례의 양민학살 사건이 빚어겼 다. 어쩌나 많은 눈이 내렸던지 어린이들은 목까지 눈이 차올랐다. 이 마을은 소개지역이어서 마올 사 람들?J 집을 비우고 나왔으나3즙대로부터 들어가도 좋마는 허가를 받고 귀가 했다가 떼죽음올 당했다. 모팽마올은 파평 윤씨들의 자작일촌 마을로 지금도 입구에 있는큰제설과아픔드라 당산나무들이내력 있는 마을잉올 알려준다. ‘합평지역에 지원 나왔던 8중대가 들어가 살아도 좋다고 하대요. 날씨가 추워 오갈 데 없던 사람들은 안심하고 집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느닷없이 악영 높은 5중대가 나타냐 다시 동네를 비우라는 거예요. 마윤사람뜰은옷가지를챙길켜를도없이 겁어l 질려 Ut을을 빠져 나왔지요. 그런데 쌍구렁재 왼쪽 산기 긁에 가관총을 설지하고무조건i갈지는 거여l요. 그날 우리동네 사람 많이 죽었지요.샤 아바지를 따라 피난올 나오냐논두렁에 뀔러서 」싹 숨을 구한 융오중씨 (56)의 증언이다. 당시 아홉살이 었던 윤씨는 마올 입구에서 개머리판으로 죽도록 두 듬겨 맞고 뒤늦게 쫓겨 나오다군인들이 눈을 돌러는 사이논두렁으로굴러목숨을구했다. 그러나윤씨는 이날 사고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러고 임신한 큰 누 나와 작은 누나, 생질녀 둥 6명의 혈육을 잃었다. 뱃 속에 든 아이까지를 합하연 7명의 목슴이다. 모평마을에 내려진 죄목은 명령 불복종. 5중대가 마을을 비우라고 했는데 비우지 않았다는 죄목이다 . • 쌍구렁재 산비탈에는종환이네 기핫막에서 쓸라 고 해놓은 장작더미가 있었는데 그 속에다 사람들을 올려놓표불을질렀어요 동내싹람들과。ll-커들뺀←---­ 그을려 벼렸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올 건진 윤경중씨(나주 공산중 교사)는 당시 쌍구렁 일대가 사랑 타는 냄 새로 코를 들 수 없었다고 -말한다. 윤써의 증언운 계속된다. ‘쌍구렁재에서 각시샘에 이르는 길목은 사랑의 시 체가가올철 벗가리를흩뿌려 놓은듯 했고논배미에 머리를 처 박은 사람. 죽어벼린 엄마의 젖무덤을 헤 치다 얼어 죽은 아이 동 차마 눈올 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윤경중씨도 이날 당숙과 당숙모 동 많은 혈육블 잃었다. 윤써는 당시 사앙한가족들올 가매장 했다가 뒷날 이장했는데 피붙이가 없는 사람은 한달 가까이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말한다. 이날 사고로 50명이 넙은 옥숨이 한날 한시어l 끊어져 이 마올 역시 매년 음력 섣달 초나흩날 제사를 지낸다 f 사망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같은 안행은 바로 다음날인 초엿새날 냐산연 우치려 계동마을과 우지마을에서도 있었다. 이 마올 역시 오전 10시께 바올.사람들을 동네 앞으로 불러놓고.군경가족블만 남기고 모두 죽였다. 사짱자는 모두 19명. 당시 남 자들은동네를-피한뒤라대부분집에 있던부녀자 들이 당했다. 、계동댁이라 부르는 할머니는 총단이 팔을 관통해 팔이 부랴진 채로 평생올 살았다. 공무원 이모써(6이도그날그곳에선 어머냐를 잃 었다. 그는 직장관계로 신원 조회를 받올 때 마다 울 분올 겪어야 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까닭도 모르고 죽어간 어머니가 빨지산이 되어 있기 때문r어머니는 ‘51 년 l월 l4일의 전투에서 사살된 자.로 기록되어 있다. 유족회측이 진상올 밝히려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연유다. 회생자이기는 커녕 아직까지 억울한 누명올 /27 - 3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