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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작전 「堅慶輔」 「함평양만학살사건」은 지급으로부터 38년전, 6 .25를 겪으며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특히 양민 5백여명이 3개변 에서 3회에 걸쳐 집단으로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서건으로 「居昌양민학살사건」을 들 수 있다. 발생과정이 공비소탕 작전중에 빚어 졌다는 점, 재판은 커녕 간이심사 또는 선별 절 차도 없이 무차별 사살되었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이 「견벽청야」라는 작전개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지휘관으로 두고 있던 육군 00사단 소속이라는 점도 같다. 「견벽청야」라 하는 말은 중국의 河承天이 쓴 「안변론」에 나오는 말로 「성밖을 말끔하게 치워 버리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린 다J(堅뿔淸野 以俊其來) 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 고있다. 그러니까 적이 준동하는 작전지역을 무조건 말 끔히 씻어벅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것. 이것 은 모택동아 말한 「水魚理論」과 일맥상통한다. 물과 고기의 관계인 공비와 주민을 분리시키기 위해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을 말끔히 쓸어버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함평사건을 겪은 유가족이나 현지 주민들은 이 사건을 「제 2의 거창사건」이라고 말 한다. 발생시기가 함평사건이 거창사건보다 약 2 개월 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다르다면 다를뿐이 다. 그런데도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그 내용이 밝 혀진 거창사건과는 달라 함평사건은 세상에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대조 를 이루고 있다. 거창사건은 발생 40일 만인 51년 3월 29일 현 지출신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서 폭로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건의 중대성이 감안되 어 국회조사단까지 구성되기도 했었다. 이조사단 은 현장접근을 방해하기 위해 공비로 위장한 국 - 3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