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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뱃힌6'25의싸,따平~핑학앙사건 ..... ‘ 453 나는 아프다고 죽는 시늄을 했지요. 그렇게 해서 그들과의 행동에서 빠 져 나올 수 있었지요. 지금도 그때 의 상처때문에 귀가 잘뜰리지 않는 답니다」 [생니-댄않빼 따애 〕〔}삐뻐 i @@ω 파 tN 응@파] 「누가 반역자냐」 소백산맥의 끝부분인 불갑산은 높이 가 5백15m밖에 되지 않지만 모악산을 비롯해 우뚝우묵 솟은 송이벼섯 같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경쳐 있고 골이 깊고 숲이 울장할 뿐 아니라 영역이 넓어 예로부터 명산이라고 불려졌다. 공비들은 이같은 지형을 이용해서 이곳A로 온 것이고 전남 서남 지구 사령부로 삼고 있었던 것. 이에 반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장성의 태청산은 불감산보다 높지만 산만 덜렁 있어 은 폐하기가 어려워 본부 등£효는 사용 하지 못하고 불갑산 본부의 지대 역할 만 했다. 이 때문에 불갑산에 모여든 인원은 수천에서 수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었 다. 이들은 가마니와 벗짚을 깐 다음 짚마-름이나 담요를 덮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식량은 처음에는 들녘에 있었 불갑산이 라도 가 있£라고 권유하더 군요. 그때 같은 학도병 의 고자질로 일가족이 몰살당할 뻔 했으나 끝내 그 꾼인의 덕~~ 살아나게 ↑ 되어 입 산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 만큼 어수선해 언제 목숨을; 잃을 지 몰라 불안해 할 때이니까 어떻게 보 면 깐이l 있는 편이 한쪽 위험은 없 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역시 R씨의 말이다. 『나는 마을에 있는데 좌익 입산하자고 강요하더군요. 않으연 가촉을 몰살하겠다7 그래서 부득이 입산은 했지만 절대 로 좌익활동은 하지 않겠다마 다짐 했지 요. 아버지께서 좌익활동하면 싼아남지 못한다고 하셨거든요. 그 래서 입산한 다음 그들이 「총을 들 고 빨치산 활동을 하자J r식량을 구 하러 내려가자J r당조직 활동을 하 자」고 할 때 꾀를 냈지요사실 그 때 내 나이 19세니까 그들에1게는 총 을 닫고 싸우는 「전사」로서는 가장 얀성마춤이었겠지요. 나는 양쪽 귀 i 어l다 불을 붓고 귀가 아프다고 그랬 지요. 며칠 지냐니까 귀가 붓고 고 룹이 나오고 잘들려지 않고 ;그래요. 「산의 도시」 좌익 활동 향에서 불갑산을 향해 일제히 진격하 는 대토별작전을 강행하게 된다. (작전 개시 일자가 「공비토별사」나 「꽁벼 연혁」에는 2월20일(음력1월15일)로 되어 있£나 이 작전과 관련 있는 대부분의 사 랑들은 하;루천인 2월19일(음력 1월14일)로 기억하고 있어 약간 엇갈리고 있으나 여 기서는 공식기록에 따르기로 한다) 대보름 작전이 개시될 당시의 전선 은 유엔군과 국군이 경기도 여주 이천 까지 밀려 내려왔다가 수도인 서울 탈 환을 위해 총공세를 평으로써 중공꾼 이 퇴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불갑산에는 최하 l만명에서 최 고 수만명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함 평 • 장성 • 영광 군을 비롯해 무안 · 꽉 포 지역에서까지 모여든 좌익계열은 물폰 일반 민간인들까지 운칩 해 있었 다는것. 당시 불강산은 하니의 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을 했거나 좌익 쪽에 가까운- 사람들만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국군과 ?영찰이 진격해옴에 따라 우선 총격전에 대한 두려움과 우익인사의 감정적 보복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단 피신을 하고 보7}는 입장이거나, 좌익들이 함께 입 산하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협박에 따라 입산한 사람도 많았다는 것. 『당시 나는 학도병이었는데 같은 학 , 도병이 자꾸 없는 죄를 만들어 국군 에게 고자질해 곤경에 처해 있었융 니다. 어느날 국군의 한 사병이 단 5분이 라도 더 살고 싶으면 당분간 생각합니다』 월야지서장이었던 L씨 말이다. 그러나 이 지시는 이때 처읍 내린 것은 아닌듯 하다. 왜냐하면 월야면 동촌이나 6개 마올에서도 마을에 틀어 서면 팽이나 삽을 회수했었기 때문이 다. 이것들은 나중에 노획무기로 보고 되었던 것 갇고 사살된 민간인도 공비 사살 숫자로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많 다. 『무기가 없논 、우리는 향상 군인들을 따라다니며 불지르고 사람을 나오라 고 외치는 역할을 했었는데 팽이나 삽 등을 줍는 역할도 했지요. 그래 서 마을에 들어서연 우선 삽이나 팽 이부터 쟁겨야 했어요. 나중에 이것 들을 노획무기라고 그러데요』 R씨의 증언이다. 이같은 군인들의 무자비한 작전 중 에도 의식있는 사뱅블은 「이러면 안되 는데」라변서 무참한 인명피해를 안바 까와 했었다. 앞서 J씨나 R씨가 군인 들의 도움우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고 앞서 모평 마을 학살에샤도 어느 군인 이 한가족에게 빨리 피하라고 권유했 던 데서 엿보인다. 그러나 5중대는 음력 대보류인 51년 2윌20일에 실시되는 불갑산 대로벌 작 전에 투입돼 불갑산의 공비근거지를 궤멸시키는데 주똥적 역할을 하게 된 다. 「대보릎 작전」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작전에서 국군은 이날 새벽 함평군 히l 보, 나산 신광변 방향, 장성군 상서, 삼계면 방향, 영광군 묘량, 불갑산 방 452 ...... W(J.I,(I::~.1989.6 ιJ μj 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