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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M- 댄않빼 따메 킬뻐 i@@ω파 tN 。。@파] 아직도뱃힌 6.25의센,싸:>Tcμli:;회삼사건 ...... 441 인천상륙작전으로 북£로의 퇴각로 가 차단되자 함평, 장성, 영광, 무안, 목포지역 좌익세력들이 모두 불갑산으 로 모여들었다. 산은 더 높무나 지세 가 약한 태청산은 주로 장성 쪽에서 온 일부 공비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었 다. 공비들은 국군이 밀려오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들녘에 쌓여 있는 벗단 을 훔쳐다 산에서 타작을 하는가 하연 나중에는 인근 동네 심지어 30km이상 떨어진 곳까지 드나들며 주민들올 협 박해 식량과 반찬을 확보해 갔다. j燮; L*.찍 -‘전F‘ K씨의 증언이다. 그도 이날밤 F잔 ?펠 치에 참석한 후 밥중에 내려와 잠을 꽃 차다가 총소리를 듣고 군인들이 오는 젠 출 직감하고 군인들이 쏘는 총알 사이 j 를 뚫고 동네 뒷쪽으로 달아났다』고 ’ 했다. 만약 군인블에게 붙잡히면 또 어떤 곤욕을 당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는것. ‘ r내가 도망간 것은 국군의 보복작전 인 줄 알이·차렸기 때문이죠. ' 3명이 전사한데다 그날밤 좌익들이 늦게까 지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며 팽과리 와 정을 치면서 떠들어 대며 약을 비들의 「승전축하잔치」에 대한 「보복」 우로 펼쳐졌을 것이라는 게 당시 -주민 들이 보는 추측이다. 5중대 병력은 4일 오전 주둔지인 해 보면 금덕리를 떠나 장성군 삼서면으 로 연결되는 도로를 따라 동촌 u}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공비의 습격월‘ 받 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목격자들은 두가지혹 엇 갈린 증언을 하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K씨 (68)는 r () 1 날 군인들과 꽁비들은 한참동안 교전했었 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날 학도병으 로 5중대를 따라 다녔던 해보면 금덕 리 R씨 (55)는 「군이 전진해 가는데 갑 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3명이 쓰러졌 다. 아마 공비 한두명이 잠복해 있다· 가 쏘았던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날밤 공비둠은 .동촌과 신기마을 사이에 있는’홍산에서 「승전축하잔치」 를 크게 벌였다. 돼지를 잡아놓고 동 4•'(j ...... ~씨ι센'1989-6 선 그는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 었다. 그가 부하에게 무어라고 외치는 가 싶더니 기관총과 소총소리가 요란 ι 하게 울려 피셨다. 논바닥에 서 있는 주민들을 향해 총탄이 일제히 발사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머리와 가슴에서 피 를 뿜으며 모두 쓰러졌다. 짐깐 동안 의 일이었다. 장교의 명령을 받은 10 여영의 사병이 쓰러져 있는 시체 사이 l 돌아다니며 발로 ;톡톡 차보고 꿈틀 거리면 다시 총을 쏘았다. 확인사살이 었다. 이 모든 과정이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군인들윤 『남운 사람들은 모 두 문장(면소재지 마을)~로 가라』고 한 후 이 마을을 떠났다, 오전 9시쯤 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승전축하잔치」와 「초토화작전」 | ωω。 - 올렸기 때문에 군인들이 부아가 나 게도 생겼지요』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우익 적인 성향이 있거나 지주계급 또는 평 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들을 납 치해 무참하게 학살하는가 하면 웬만 한 사람들을 자기들 편..9..로 끌어들이 기 위해 유인하고 다녔다. 또한 실탄 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이따금 국군 을 기습하고 지서를 습격했었다. 동촌 마을에서 불과 10km도 안 떨 어진 장성군 삼서면 삼계리 명주동의 주민 70여 명이 공비들에 의해 학살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 다. 또한 함평군 해보지서, 월야지서 나 장성군 삼서지서 등이 자주 습격당 다음날 마을로 돌아온 K씨는 불에 타버린 동네 앞에 즐비하게 늘어진 시 체들을 발견했다. 살아 남판 주민들은 JI ': 해보면 금덕리로 소개하라는 바람에 I :.'. 모두 떠나 마쓸은 텅 비어 있었다 챙 ; 시체들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있다 깃 가 후에 노인네들이 와서 붙어주었다. s 샅 젊은 사람들은 붙잡힐까 봐 마윤 부근 g꽉, 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 당시 공비들은 이곳에 서 lOkm쪽 병 텐J익진 불갑산(해발 515m)과 태청산(쇄 젠켠 593m)을 근거로 발호하고 있었다 찌 ,> 'î 촌과 신기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징과 랭과리를 치며 시끌벅쩍하게 떠들어 댔다. 한가운데 모닥불인지 봉회 룹인 지 알 수 없는 장작더미 불을 피워 놓 고 벙 둘러 앉거나 서서 떠들었다는 것. 이.때 마을사람들은 이플의 동원 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기 피하면 언제 끌려가 비잔하게 살해당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r그들이 오라고 해서 가지 않으면 2, 3일이 지나지 않아 끌려가게 씌 고, 끌려갔다 하면 죽장과 낫에 찔 려 비참한.죽음을 당하는 일이 수없 이 많았지요』 그 시각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 다. 1구인들은 이 마을을 떠나 효橋, 일 d 진다라 마을을 거쳐 장성쪽우로 가 는 도로를 따라 전진해 갔다. 이들은 진다리마을에서도 인가에 총을 난사해 5 ,6명의 주민을 희생시켰다고 한다. 「함평양민 학살사건」은 이렇게 시작 됐다. 이 일단의 병력은 그 뒤 월야 면, 해보면, 나산면 일대에서 다시 「작전」을 펼친 제。。사단 제 00연대 제 00대대 제 5중대다. 이날 5중대의 동촌마을 초토화 작전 은 전날 있었던 공비들과의 교전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