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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간행물 보도 자료 1993년-2009년] ! -.,톨럭 건 즉결처형해 억울하게 죽었다. 원칙적으로 보련 가업 대상자들은 ‘국가보 안법에 저촉되는 활통을 한 사람 중 전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로당 원은 물론이고 전형, 민주주의 민좀전선, 부 녀동맹, 예술가 동맹 퉁 외팍단체와 신민당, 심지어 김 구 선생이 이끌던 한독당원까지도 보련에 강제 가입되는 일이 많았다- 보련 가 업이 강제적이었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희한 한 일도 벌어졌다. 초기에 ‘보련=관채 공산 당’으로 소문이 퍼지자 지방 경찰기관들에서 는 무지한 농민들을 상대로 국가얘셔 특혜를 준다는 식으로 속여 ‘가업 실적’을 채우는 일 도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어쨌든 보련 업안자 오제도씨의 증언처럼 30여만 명에 달하던-보련 소속원은 개전 초 기엔문참히 함살닫한다. 서울과 정기 붐분지 방 보련원 3만여 명만 이 학살올 모면했을 뿐 이다. 당시만 해도 라디오와 신문이 트문 편 이었기 때문에 6월 말까지 다수 국민은 전쟁 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잘 모른 채 늦은 모내 기에 ll}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수원 이남의 전국 각 경찰서, 지서얘서는 정 기 교육 소집령을 보내 보련원들을 자발적으 로 모은 뒤 일사불란하게 처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수효는 30여만 명에 01를 것이 라는 게 4 . 19 직후 전국 각지의 유족들이 국회에 제출한 청원 내용이다. 보련 학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학살에 대한 ‘정당성’ 주장은커녕 논의조차 금기시했 기 때문에 그 원인과 책임 문채는 아격까지 미궁에빠져 있다. 오제도써는 이렇게 말한다. “문민 정부가 보련 가업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확인해 국가 차원에서 위령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l 톰륜톨견굉털혐톨잉암 50년 12월6일과 7일, 51년 1월12일 3차례 에 걸쳐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병력에 의해 함평군 월야면 · 해보면 • 나산 면 양민 5백24명 이 집단 학살됐마. 이 사질을 60년 5월23일 민주당 김의택 의원 외 11명의 국회의원이 함평 현지를 찾아 진상조사 작업 을 벌인 뒤 제35회 국회 본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내역을 살펴보면 50년 12월6일에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동촌부락 주민 60여 명이 학살됐고 12월7일에는 월야 면 정산리 6개 부락 양민 3백여 명이 학살됐 << 다. 또 51년 1월11일에는 해보면 상곡리 모 평부락 주민 1백28명과 나산면 우치리 주민 46명이 학살됐다. 당시 5중대(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함평 군 불갑산에 은거하고 있던 공비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이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5중대의 행위는 당시 상부에서 시달한 작 전명령파 상반되는 것이 었다. 작전명 령은 u양 민을 산간 벽지에서 평지로 소개시키고 농작 물에 대해서는 공동 작업으로 수확케 하는 한편 아군의 통신망과 보급로 및 기동에 유 리한 거점을 확보해 잔비 소탕에 만전을 기 한다”로 하달되었다. 그러나 5중대는 작전으 로 양민에 대해서는 학살을, 곡식에 대해서는 방화를 자행했음이 드러난다. 5중대의 작전 행태와 관련해 당시 월야지서장이었던 이O O씨 _(79) 는 이렇」꺼1 환Jl:폈다. “그때 장성군과 함평군 경계 지역에서 작 전회의가 열렸다. 경찰은 나 혼자 참석했는데 그때 5중대는 ‘무조건ι 하루에 50명 시잘, ’무 기 50점 노획’올 지시했다. 그런 지시 때문에 민간인이 많이 ‘희생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시의 전과 보고는 사살한 양민들로부터 자 른 귀와 호미 '. 낫" 둥 농기구 수조차 전과로 취급한 실정이었다고 한다. 함평 양민학살‘사건 역사 60년 제4대 국회 의 진상 조사와 명예 회복 결의에도 불구하 고 이듬해 발생한 5.16 쿠데타에 의해 덮어 버려 유족들 가슴에 한올 심어준 채 오늘에 이르고있다. l~ 를를톨펀훌폼홈훌함캘녕같-톨 6.25 개전 초기에 대구형무소와 부산형 무소에서 기결수 · 미결수를 포함한 수용자 전원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이다. 4 , 19 격후 국회 조사단 경북반으로 파견된 윤용구 · 주 병환 · 임~}주 국회의원은 대구형무소의 경 우 1천4백2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보고했다. 대구형무소측이 조사반에 제출한 가해자는 특무대 헌병대 경찰이라고 적혀 있다. 보고서 에는 그밖에 대구형무소에 병설하고 있던 육 군형무소의 관리 상황과 수용자 처리 결과는 알 수가 없다는 내용도 곁들여져 있다. 대구형무소 학살 사건과 관련해 4. 19 직 후 경북 · 대구 양민학살 유족회 조사부장을 맡았던 이복령씨 (62 . 대구 거주) 는 당시의 유족회 조사 내용을 이렇게 증언한다. “대구 형무소에는 전쟁 직전 수감자가 6천3백여명 있었는데 조사 결과 3백여명은 개전 초기에 부잔형무소로 이감되고, 6천여명은 전원 학 살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학살은 경산군 경산 면 평산동 뒷산 코발트광산 지하 갱 속에 처 넣는 식으로 자행됐다. 4. 19후 유족회에서 유골을 찾으려 했으나 장비가 부족해 도저히 C>>. ~ 시사저널 1993.7.8 A 냥 1 l A n J